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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


     Conservatism and Progress


    보수와 진보라는 두 어휘가 우리들 입에 회자되고 있다. 우리에게 낯설었던 이 단어들이 어느 날 불현듯 우리들 앞에 등장한 것이다. 이 두 단어를 두고 시민들이 편 갈라 싸운다. 어느 저명한 법률가의 글에서 보수 즉 우파는 “질서 즉 법의 편”으로 “옳은 쪽(오른쪽이 아닌)”이며 “원칙을 지키고” "반듯하고 선량"하면서 "술수를 부리지 않는 사람, 정직한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린 인용문이 있었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러한지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I. 보수란Conservatism?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현상 변경을 원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로” 정의되며, 한 사회가 지금까지 보존해 온 전통과 관습을 가장 보배로운 자산으로 본다.  17세기 영국의 정치가 캐리(Lucius Cary, 1610~1643)는 “멀쩡한 물건은 고칠 필요가 없다” 라고 했는데 이는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을 표현한 것으로 위험을 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말하고 있다. 보수주의는 변화를 싫어하고 현상 변경은 사회를 더 낭패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허황된 약속보다는 고칠 필요가 없는 과거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안정된 사회가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보수주의는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에 반대하고 “기왕에 해본 것”에 집착한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사회의 공동 이익에 부합해 온 멀쩡한 제도를 버리고 그 유용성이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법이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관점이다.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보수주의 아버지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그의 논문 “프랑스 혁명 회고록”에서 “오직 과거의 법과 전통만이 우리의 자유를 지킨다” 라고 했다. 이렇다 보니 보수주의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반대하는 반동적인 성격을 띌 수밖에 없었다. 문학상 나타나는 보수주의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돈키호테이다. 돈키호테야말로 개혁주의자인 그의 부하 산초 판자의 눈에 비친 변화를 모르는 상징적 인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수와 진보를 이해하려면 그 근대적 시발점인 토리(Tory)와 휘그(Whig)라는 어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토리는 영국 보수당의 전신, 휘그는 노동당의 전신이다. 최초의 토리는 크롬웰 혁명(1649) 당시 의회와의 싸움에서 왕을 지지한 왕당파들이었다. 즉 구질서 지지자들이었다. 혁명의 주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청교도로서,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 성공회 지배체제의 폐지를 요구한 인물이다. 그의 요구는 왕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 복잡한 내용이야 어찌됐든, 크롬웰 혁명은 챨스 I세를 중심으로 한 성공회 중심의 구질서와 개혁을 원하는 신질서 청교도 간 싸움이었다. 즉, 앞에서 말한 양심, 정직, 선량, 옮음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사건이었다. 크롬웰 혁명으로 처형된 챨스 I세를 이어 그의 아들인 챨스 II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1658)왕정이 복고되었다. 그 후 1678년 챨스 II세의 동생인 요크 공 제임스가 왕위계승권이(영국, 스콧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으로서)있느냐의 여부를 놓고 휘그와 토리가 대립한 적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휘그는 제임스가 로마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 휘그는 제임스가 국왕이 되면 프로테스탄트에게는 물론 자유권, 재산권에 심각한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상속에 의한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것이다. 이에 반해 토리는 제임스를 적극 지지했다. 이 싸움 역시 각자의 이익을 가운데 둔 대결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 후 명예혁명 당시(1688) 휘그는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제임스 II세를 쓰러뜨린다. 명예혁명의 결과 제정된 권리장전(Bill of Rights)은 절대군주의 권한 제한, 의회의 권한 강화와 의회 내 발언의 자유, 정기적인 의회의원의 선출, 국왕에 대한 청원권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 권리장전은 마그나 카르타(1215), 인신구속법(1679), 권리청원(1628), 의회법(1911), 인권법(1998), 평등법(2010)과 함께 영국 불문헌법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휘그는 민주주의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과 공헌을 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보수 세력인 토리는 18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의회주의를 반대하고 왕정, 로만 가톨릭, 그리고 전통적인 정치 시스템을 지지했다.

    토리와 휘그는 초기 미국에 그대로 이전되어 미국 독립전쟁에서 휘그는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조지 워싱턴, 제임스 메디슨, 존 애담스, 앤드루 잭슨 등이 대표적인 아메리칸 휘그이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의 토리는 독립을 반대하고 기존 질서인 영국을 위하여 싸운 사람들이다. 독립 후 휘그는 정치적 정당으로서 도로, 철도, 운하 건설 등 새 나라 건설에 힘썼다. 반면에 아메리칸 토리는 독립전쟁 당시 영국의 편에서 싸웠던 사실을 부끄러워하여 많은 사람들이 휘그로 전향함에 따라 하루아침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미국에 보수당이라는 명칭의 정당이 없는 이유이다. 아메리칸 휘그는 현 미국 민주당의 전신이다.

    미국 독립(1776) 직후, 그러니까 명예혁명이 있은 후 100년이 지난 다음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1789)은 구질서(Ancien Régime)를 청산한 사건이었다. 구질서란 왕정, 귀족제도, 로만 가톨릭, 봉건제도 등에 집착한 가치체계이다. 우리로 치면 조선 왕정, 양반 제도, 유교 등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혁명으로 앙샹 레짐이 붕괴되었음은 물론이다. 혁명 당시 토리와 휘그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그대로 토리와 휘그와의 싸움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프랑스 혁명은 구질서인 로마 가톨릭과 신질서인 프로테스탄트 간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혁명파 모두가 개신교도는 아니었지만 혁명 주도자 로베스피에르는 교조적인 프로테스탄트였다. 이처럼 신·구 질서 간의 싸움이었지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반듯하고 선량하며 정직한” 구질서와 그렇지 않은 신질서 간 다툼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또 당시 프랑스 국민회의(National Assembly)에서 의장의 오른 쪽에는 구질서인 왕당파, 왼쪽에는 개혁파, 가운데에는 온건파가 자리한 것이 지금의 좌·우 그리고 중도로 불리게 된 단초였다. 이처럼 자리에 앉다 보니 좌우로 불리게 된 것이지 옳고 그름이 좌우를 가름하는 기준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처럼 보수주의는 토리와 휘그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 이 보수주의(Conservatism) 라는 용어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1834년 영국의 토리당을 보수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으로 개명하면서부터이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화에 따른 자유주의적 개혁과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보수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백성에 대한 통제를 가치체계로 하는 보수주의가 개혁과 자유를 싫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여러 나라에서 사회 개혁이 계속되었고, 특히 보통선거 제도의 확립으로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됨에 따라 위협을 느낀 보수주의는 이에 온 힘을 기울여 저항했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정책에 따른 시민의 권리 확대와 이에 따른 복지 확대는 자연히 재정 수요의 확대를 초래하면서 재정의 낭비를 불러온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와 로날드 레이건 정부에 의한 자유경쟁시장, 규제철폐, 작은 정부 등 신자유주의적인 아젠다들은 19세기식 완전 경쟁에 토대한 100% 고전주의적 자본주의로 회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간의 이 같은 낭비적인 복지정책을 극복하기 위한 고전적인 보수주의 정책이었다고 할 수있다. 경제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이라는 레이거노믹스는 1960년대를 휩쓸었던 젊은 세대의 반문화 - 그때까지의 전통 문화에 대한 저항 - 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II. 진보란Progress?

    진보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인간 복지의 개선”으로 정의된다. 진보주의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 제 분야의 전진(Advance)이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개선시킨다고 본다. 인류는 긴 역사를 통하여 삶의 조건들을 개선시켜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여 나아갈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지란 무엇인가? 이에는 가치일원론과 다원론이 있다. 일원론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다원론은 여러 가치(인간의 행복에 필요한)의 총합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복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어려운 문제이므로 그냥 "사회생활 환경을 개선" 하는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진보에 관한 이론적인 학설은 18세기 유럽에서 처음 출현했다. 이 시기는 계몽주의 시대(30년 전쟁이 끝난 1648부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로서 인류의 행복(복지)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닌 인류스스로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의 진보사상가들은 역사 발전의 근본 법칙들을 어떤 철학적 깊은 사념이 아닌 보편적인(일상적인) 사회 현상에서 찾았고, 이 법칙들을 미래를 예측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보았다. 많은 진보사상가들의 생각은 모두 이 같은 보편적인 역사관에 토대하고 있다. 흄(David Hume, 1711 ~ 1776), 애담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1727~1781), 헤겔(G.W.F. Hegel, 1770~1831),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맑스(Karl H. Marx, 1818~1883),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주장을 이 지면에 모두 열거할 수 없으므로 튀르고와 애담 스미스에 대해서만 약술한다.

    영국 경험철학의 영향을 받은 튀르고는 모든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 근거한다고 했다. 튀르고는 과학적인 진보는 수학과 기술의 진보에 의존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같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복지에 대해 적극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과학적 발견과 정치적 자유가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킨다고 보았다. 또 정치제도가 과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천재들에 의해 발전하지만 천재들은 정치제도에 의해 양성되기 때문에 정치제도는 과학의 진보에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정치제도가 과학의 발전을 고양시키거나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컨대 과학적 천재들에게 독재 체재는 최악이며 그들을 양성하는 건 민주공화정이라고 했다. 자유스러운 정치제도만이 과학적 발견의 본질적인 환경이라고 했다. 또한 과학적 지식의 발전이 정치적 자유를 가져온다고 했다. 이 주장은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수상자가 대부분 서구 과학자들이라는 사실로 증명된다.

    애담 스미스는 스코트랜드 계몽주의 경제학자이며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이론이 가져온 부는 20세기 진보 활동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획득된 시민의 정치적 자유는 마땅히 경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제 활동에 국가의 간섭이 없는 자유방임(laissez-faire)을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후일 보수주의 노선이 된다. 정부의 간섭이 없는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야말로 도덕적·물질적 진보를 가져오며 한 나라의 공동선을 위해 최선이라고 했다. 그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하는 야경국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완전경쟁에 토대를 한 애담스미스의 고전주의적 자본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빅토리언 자본주의(영국 빅토리아 여왕 통치 기간(1837-1901))이다.

    이제 완전 경쟁에 토대를 한 산업화와 자유무역의 확대에 따라 거대한 부가 생성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걸 차지하는 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그 결과 통제를 벗어난 독점적인 기업 행태, 근로자와 자본가의 격렬한 대립, 빈부격차가 초래된다. 국가의 통제가 전혀 없는 자유방임에 의한 자본주의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과 근로계층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가져온 것이다. 챨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탐욕의 상징 스크루지는 바로 자유방임적인 영국 빅토리언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경제활동의 자유방임에 기인한 이와 같은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의 붕괴는 자유방임적인 사상에 극적인 반전을 불러온다. 이처럼 통제받지 않은 자본이 초래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신자유주의자들(New Liberals; 아래 주1, 2 참조) 또는 신복지(New welfare)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개혁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다.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목표는 그대로 둔 채 그 방법을 바꾼 것이다. 즉, "진보Progress"의 등장이다. 그러니까 현대 정치철학으로서의 진보의 등장은 19세기 산업혁명이 가져온 탐욕적인 빅토리언 자본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빈곤, 폭력, 기업의 탐욕, 인종차별 같은 문제는 “자유시장이 아닌 정부가 개입,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또한 정부의 권한 행사는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시민의 복지를 증진시킬 때만이 정당하다고 했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정부의 개입"이라는 진보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라는 어휘는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 실증주의 철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였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소위 "진보의 시기(1890s-대공황까지)" 에 미국에서 광범위한 진보적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이 어휘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 시기의 미국은 진보운동의 근원지로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와 사회복지 확대가 핵심이었다. 사회 각 분야의 효율성이 강조되었고 부패와 낭비의 추방, 노동자 대우 개선, 어린이 노동법 제정, 최저임금, 주당 근로시간 제한, 여성 투표권, 소득에 따른 소득세율 차등 적용 등을 이루어냈다. 데오도르 루즈벨트(1858-1919) 대통령은 진보주의자로서 이 시대의 주요한 개혁을 이끈 인물이었고, 32대 대통령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D.Roosevelt, 1882~1945)의 “뉴딜정책”은 경제에 정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진보주의 정책이었다. 그의 뉴딜정책이 가져다 준 1930년대 사회복지의 확대는 자유방임에 반대한 신자유주의자(New Liberals)사상이 달성한 가장 성공적인 사회복지 정책이었다. 대공황 직후의 1930년대와 2차 대전이 있었던 1940년대는 미국 진보운동의 대약진 시대였다. 그가 주도한 뉴딜연대(New Deal Coaliation)는 20세기 중반 미국식 자유주의로 정의되고 있다. 그 후 대내외 정책에서도 미국의 진보적인 역할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바로 20세기 미국 정치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보수는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공산주의나 파시즘으로 보고 비판했다. 하이에크( 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도 국가가 개입, 계획한 뉴딜은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비판적이었다. 야경국가를 최선으로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들 관점에서는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란 어불성설이었다. 다시 말해 경제개발5개년계획 같은 국가경제정책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링크


    이제 우리는 진보, 보수를 가름하는 갈림길은 경제, 사회 활동에 "국가의 개입" 여부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현실 정치에서 보면 100% 개입은 공산주의(극좌 사회주의), 0%개입은 빅토리언 자본주의이다. 이 두 제도는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정부의 개입 형식과 정도에 따라 40개 이상의 사회주의가 있다(아래 주 3 참조). 기독교 사회주의, 불교사회주의, 유대사회주의, 이슬람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Fabian Socialism(아래 주 4 참조).....등, 여러 스펙트럼의 사회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수정자본주의도 일종의 사회주의라 할 수 있다. 인류가 그만큼 삶의 조건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해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도 21세기인 지금, 정부가 경제 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미국 진보의 등장은 19세기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방종에 대한 반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미국의 경제 침체와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 확대는 이 같은 진보적인 정책에 회의를 가져오게 된다. 진보적인 정책으로 초래된 경제적 혼란으로 복지정책과 거대정부(경제·사회 정책에 개입하는 정부의 거대 권한)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영국과 미국에서는 새로운 집권 세력인 "신우익(New Right)", 즉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등장하였다. 이는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자유시장 원리의 부활을 뜻한 것으로 100%는 아니지만 19세기 자유방임주의의 20세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역인 마가렛 보수당 정권과 레이건 행정부에 의한 규제 철폐와 정부 지출의 축소 등 보수적 정책들은 1920년대 이래 처음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빌 클린턴 정부의 복지제도 개혁, 거대 정부가 끝났다는 그의 선언은 20세기 국가주의(경제, 사회 정책에 국가의 간섭)에 저항한 세력에 편을 들어 준 선언이었다. 이 저항은 국제적인 대규모 운동으로 번져 데이빗 카메론 정부의 자율적인 거대 사회(Big Society),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New Labor)정책 또한 20세기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같은 경제에 대한 불간섭 정책은 현재의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는 비난을 듣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상이 개략적인 보수와 진보에 대한 설명이다(C).

Written by Hung S.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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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 이 글에서는 진보와 신자유주의자(New Liberals)가 혼용되고 있다. 진보주의와 이 신자유주의 사상과는 역사적으로 같은 길을 걸어 왔고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유사하나, 또 약간의 노선 차이가 있다. 이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나,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2) 신자유주의자(New Liberals)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에 걸쳐 영국에서 생성된 일단의 사상가들로 자유방임적인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간섭을 옹호한 사람들로 지금은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라고도 칭한다. 대처 수상의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      3) Dictionary of Socialism by Angelo Rapopport

        4) 페비언 사회주의는 영국 노동당과 영연방 국가들의 노선이기도 하고 스칸디나비안 국가들의 이념이며, 세계1등 민주국가 코스타리카를 포함한 몇몇 라틴 국가들이 페비언주의를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싱가폴의 이광요 등도 페비언 소시알리스트로 분류되고 있다. 만일 대한민국이 복지 국가를 목표로 한다면, 스칸디나비안식 페비언 소시알리즘이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 보수와 진보에 관한 스탠포드 대학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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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French Revolution(1789)


 1. 프랑스 대혁명(개요)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루이15세와 루이16세의 구체제(Ancien régime) 개혁 시도가 오히려 혁명을 초래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루이 14세, 루이 15세 또는 루이 16세, 아니면 이 세 사람 모두가 혁명의 발발에 대한 책임자라고 말한다. 루이 14세 (1643-1715)에 의해 약화되긴 했지만 귀족들은 아직도 왕권에 도전할만한 강력한 세력이었고, 루이 15세(1715-1774)와 루이 16세(1774-1792)는 그 누구도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특권하에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했고 가톨릭 승려는 병원, 학교, 고아원의 운영자들이었다. 출생, 사망, 결혼에 따른 신고는 가톨릭교회에 해야 했고, 교회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거나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생아로 취급되어 법적인 권리가 없었다. 이 같은 교회와 귀족 세력의 발호는 사회적 긴장을 불러왔고 또 왕으로 하여금 개혁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루이 14세가 양위를 할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등 일련의 전쟁으로 인한 전비 때문에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었다.

    또 루이15세나 16세의 치세 기간 중 프랑스는 수많은 군사적 외교적 패배를 했고, 이로 인해 왕권의 버팀목인 군대의 충성심과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치세 초기 루이15세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치세 말에는 뽕빠두르 (Madame de Pompadour), 뒤 배리(Madame du Barry)등 귀부인들이 개인적인 취미로 정사에 관여함으로써 “여자들의 노리개”라는 말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루이 15세의 손자(루이 15세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다)인 루이 16세는 선량하고 양심적인 왕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튀르고(Jacques Turgot)같은 개혁파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튀르고의 적대자들은 그를 고집불통 또는 부패한 자로 매도하였다. 이 같은 반대 세력의 모함과 연약한 왕권으로 인해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이 났다. 낙담한 왕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왕으로 남기만을 원했다. "선량한 왕은 수많은 벌레들이 빨아 먹는 식물에 불과했다"라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다. 루이16세는 평화를 유지해야만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 등 대외 문제를 기피했고 이로 인해 왕의 권위는 더욱 하락하였다.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도 백성들의 조롱 대상이었다. 그녀는 성실한 아내 겸 어머니였지만 왕의 명성에 도움이 되는 일을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부가 악당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의 개혁 대상이었던 귀족 계급의 모략 때문이었다. 계몽주의자들, 즉 볼테르, 루쏘, 세꽁다(Charles-Loise de Secondat), 몽테스퀴외, 디드로 등은 구체제를 버티는 두 기둥인 군주주의와 교회, 불공평한 조세제도, 정의롭지 못한 법률, 노예제도, 전쟁의 악폐, 무자비한 종교, 종교의 완고함과 미신성에 대해 공격을 했다. 이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공격 역시 왕권을 약화시켜 개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경제 상황 역시 혁명을 불러온 중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는 주로 직접세에 의존하는 세입 구조였다. 특권계층인 귀족 및 승려들은 중세 이래 면세 대상이었고 소외계층이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구조였다. 루이 16세 즉위 시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었다. 정부는 채무 상환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했다. 인구의 증가, 유럽 전역에 걸친 경제의 침체, 실업의 증가, 인구와 식량 공급 간의 불균형, 1788~1789년간의 이상 기후로 인한 흉작은 식량 가격의 폭등을 초래하여 이 또한 혁명 발발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왕은 삼부회의(États généraux: 승려, 귀족, 평민으로 구성된 국민회의로 1303년 처음 개최되었음)를 소집했다. 1614년 이후 처음 소집된 이 회의는 프랑스가 직면한 위기의 해법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귀족들로 구성된 파리 최고법원 (Parlement: 구체제 하 프랑스 최고 상고 법원. 왕령이 법제화되기 전 심의 등록 기관임)은 소집될 삼부회의가 과거와 같은 조건 즉, 제1계급인 승려, 제2계급인 귀족, 기타 제3계급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투표권은 각 계급 동등하게 모두 한 표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법률가, 중소상공인, 농민들로 구성된 제3계급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제3계급은 자신들의 권리를 담은 책자"Qu'est-ce que le Tiers-État?(제3계급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최고 법원의 결정을 비난했다. 이 책자에서 제3계급은 자신들이 백성의 대표임을 선언하고 특권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프랑스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들은 루이 16세에게 제3계급에게 더 많은 투표권 즉, 다른 계급보다 두 배의 투표권을 부여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왕은 재무대신 네커(Jaques Necker)의 간언으로 제3계급의 요구를 수락했다.

    1789년 봄, 삼부회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제3계급은 이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은 것이다. 동시에 불공평한 조세 제도에 대한 불만의 편지(Cahiers des Doléances)도 작성했다. 이 문서는 혁명 전야에 다양한 계층의 여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문서는 조세권의 남용 예와 관련 지역, 해결 방안까지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5월 삼부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왕은 개혁을 위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3계급은 왕이 그들의 요구를 수락할 때까지 모든 계급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제3계급의 대표자들은 다른 계급의 대표자들에게 자신들을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1계급 1표제에 반대하여 제3계급이 만든 임시 의회. 나중에 제1및 제2계급의 일부 인사들이 참여함)로 인정하고 만나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헌법이 제정되어야 해산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때 루이 16세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인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왕은 처음 제1계급 및 제2계급 편에 서지만 1789년 6월 들어 마침내 제1계급 및 제2계급에 대해 제3계급과 만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제1 및 제2계급으로부터 왕을 보호하기 위해 베르사이유 궁에 군대가 주둔하고, 6월 11일 왕은 개혁의 상징 인물인 네커를 해임했다.

    군대의 소집과 네커의 해임, 밀가루 가격의 폭등, 부랑자와 실업자들이 파리의 거리에 넘쳐나면서 시민들은 스스로 방어를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시민들은 무기 탈취를 위해 전제적 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행진했다. 감옥 소장은 폭도로 변한 시민들의 감옥 내 진입을 허락하고 동시에 병사들에게 사격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감옥소장과 병사 6명을 살해한 후 그들의 목을 잘라 창에 꿴 다음 거리를 행진했다. "그 같은 잔학 행위가 도덕으로 여겨지고 인도주의는 우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라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다. 군중의 바스티유 점령은—그날은 지금 프랑스의 국경일이다—파리로부터의 대탈출을 불러왔다. 왕이 그 같은 폭도들을 처벌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탈출했다. 이제 폭력적인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왕은 아직까지 제3계급과 만나지 않고 있는 제1 및 제2계급에 대해 그들을 만날 것을 촉구하고 궁정 수비대를 해산했다. 한편 폭동은 지방으로 번졌다. 8월 4일, 귀족 출신 국민의회 의원 몇 사람이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로 소작인에 대한 강제노동부과권(Corvée) 등 귀족의 특권 폐지를 선언했다. 국민의회는 교회의 십일조와 면세권을 폐지하고 소수의 중요직을 제외한 공직 진출의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왕은 이 같은 개혁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대주교에게 보냈다. 8월 26일 국민의회는 인권선언(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을 발표했다.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선언서에 영향을 받은 이 선언은 인간의 자연권, 법에 의한 통치 그리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담은 역사적인 문서이다.

    베르사이유 수비를 위해 해산된 수비대를 대신하여 프랑드르 연대가 오는데, 이 군대의 환영연이 개최되었다. 이 환영연에서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흑색기가 펄럭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마라(Jean-Paul Marat)나 데무렝(Camille Desmoulins)등 선동가들이 왕은 국민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같은 소문에 따라 파리에 군중들이 운집했다. 10월 5일, 여성 시위대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빵값의 인하를 요구하며 베르사이유까지 행진에 나섰다. 같은 날 밤 왕은 국민의회 결정을 받아들이지만 군중들은 왕의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군중들은 왕궁으로 몰려가 수비대 병사를 죽이고 그 목을 잘라 창에 꽂아 행진하여 왕비의 처소에 이르렀다. 왕비는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도망쳤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입이 얼어붙었다."라는 당시의 목격자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왕궁 수비대는 민병대(질서 유지를 위해 파리 시민들이 임시로 만들었던 군대. 중산층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를 향해 겨누었던 총을 거두어들였다. 라파예트(Marquis de Lafayette, 1757~1834, 프랑스의 귀족. 인권선언을 작성한 인물)가 지휘하는 민병대의 질서 회복으로 왕과 국민의회는 베르사이유로부터 파리로 돌아왔다. 왕은 포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 바스티유 공격 -

    1789년 가을에 가장 중요한 혁명 입법이 통과되고 이때 과격파인 쟈코벵 (Jacobin Club)이 등장하였다. 쟈코벵은 자칭 헌법동지회(the Society of Friends of the Constitution)의 회원들로서 자코벵이라는 명칭은 그들이 모인 건물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791년 가을 그 회원 수는 1천 명 정도였으나 과격한 혁명 국면에서는 2천 명이 넘었다. 이 같은 회원 수와 거대한 조직으로 쟈코벵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가 있었다. 회원 자격은 처음 중산층 이상에 국한했으나, 나중에는 빈민들에게도 허용함으로써 과격성을 띠우게 되었다. 1793년에는 자코뱅은 마운틴(Mountain)의 세력 하로 들어간다. 마운틴은 좌익으로서, 좌익으로 불리게 된 것은 혁명의회(Convention) 회의 시 왼쪽 가장 맨 꼭대기(Mountain)에 앉았기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 마운틴에는 약 3백 명 가량의 회원이 있었는데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Marie Isidore Robespierre), 당통(George Jacques Danton), 마라(Jean Paul Marat)등이 그 지도자였다.

    루이 16세는 혁명의회로부터 왕의 거부권 제한이라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혁명의회는 정부 채무를 갚기 위해 교회 재산을 몰수·매각하고 공채와 지폐(Assignat, 혁명정부가 발행한 임시 지폐)를 발행했다. 이어서 교회 개혁을 위한 성직자법(the 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을 통과시켰다. 교구를 재편하고 주교 수도 138에서 83명으로 줄였다. 교회 종사자들도 모두 국가 공무원으로 간주하여 공무원법이 적용되도록 하고 급여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하였으며 모든 승려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도록 했다. 이 같은 조치는 당연히 가톨릭의 저항을 불렀다. 138명의 주교 가운데 충성을 맹세한 주교는 7명에 불과했고, 전국 가톨릭 승려의 반 정도만이 충성을 서약했다. 1791년 교황이 성직자법을 비난하고 충성을 서약한 자를 파문하겠다고 하자, 이들 승려의 반이 서약을 철회하기도 했다. 혁명은 교회를 두 종류로 갈라 놓기도 했다. 공식적인 교회와 지하 교회가 그것이다. 개혁 입법으로 인해 국가는 교회와, 파리는 로마와 싸우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교회의 분열은 1801년 나폴레옹이 교황청과 화해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은 혁명에 환멸을 느꼈다. 1791년 왕의 가족들은 전통에 따라 부활절을 보내려고 시골로 가려고 했으나 민병대가 이를 제지했다. 자신이 사실상의 포로이고 또 백성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왕은 파리를 탈출하고자 했다. 1791년 6월 파리를 탈출했지만, 불운하게도 혁명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두고 떠났다. 왕의 가족들은 다시 파리로 압송되어 왔다. 국왕의 도주로 인해 헌법의회( 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국민의회 후신으로 1789년부터 1791년 9월까지 기능함. 사실상의 통치기구로 신헌법을 제정함)는 왕이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쨌든 국왕은 그에게 제시된 새로운 헌법안에 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헌군주 제도를 담고는 있었지만, 새 헌법은 그러나 일 년도 못 가 폐지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위기가 입헌군주제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유럽 여러 열강들은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혁명으로 프랑스가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침략자로서의 기능을 잃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사태에 개입하기를 원했다. 1791년 6월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II세는 파두아 교서(Padua Circular)를 통해, 유럽 각국들이 단결하여 혁명 확산을 막을 것을 촉구했다. 프랑스는 프랑스 내 교황령을 몰수하고 국제 조약을 위반하는 등 더한층 적들의 공포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왕은 전쟁을 원했는데, 전쟁으로 군대가 붕괴되면 백성들이 그의 편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의회 내 주도적 세력인 지롱드(Gironds) 역시 전쟁을 원했는데, 전쟁에서의 승리는 외국인들이 혁명의 편을 들 것이고, 그렇다면 혁명의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이들은 숫자에 있어서도 130명으로 뛰어난 웅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1791년 8월 필니츠 선언(the Declaration of Philnitz)을 통해 레오폴드 II세는, 만일 유럽 국가들이 동조할 경우 혁명을 분쇄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만일’이라는 말이 들어가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이 선언은 프랑스에 전쟁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로베스피에르 같은 강경파도 전쟁의 무익함을 주장하여 반대했지만, 1792년 4월 프랑스는 대오스트리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이제 프랑스에 대재난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만일 프랑스 왕이나 왕비에게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보복할 것임을 선언했다(the Brunswick Manifesto, 1792년 7월 25일). 이 선언은 전쟁을 원했던 루이16세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키는데, 왕이나 왕비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왕이 반혁명일지도 모른다는 혁명의회의 의구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프랑스는 전투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많은 장교들이 탈영하거나 망명을 했다. 군기가 문란해지고 장교를 살해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자 전쟁을 반대했던 로베스피에르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왕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확산되었다. 경제도 악화되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고 생필품 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했다. 지방으로부터 혁명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파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마르세이유로부터는 적대적인 노래 마르세즈(Marseillaise)를 -나중에 프랑스 국가가 된다- 부르며 빠리로 진군해 들어왔다.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같은 선동가들이 헛소문을 퍼뜨려 폭동을 부채질했다. 그들은 왕을 축출할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제2의 혁명”이 발생했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튀르리(Tuileries: 파리 세느강변의  왕궁)를 공격, 스위스 용병수비대 6백 명을 죽였다. 폭도들이 또 혁명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의회는 투표로 왕권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공포했지만 폭동은 그치지 않았다.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민병대가 오스트리아 군에 패배하고,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인 베르덩(Verdun)을 점령했다. 적과 내통한 반혁명 세력이 혁명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소문에 폭도들은 포로로 잡혀 있던 가톨릭 부녀자와 어린이 1천300명을 학살했다(the September Massacre).

    반격에 나선 프랑스는 곧 발미(Valmy)전투에서 오-프러시아 동맹군을 격퇴하고 프러시아 군대의 파리 진격을 봉쇄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라인강 좌안의 사보이를 공략했다. 이 같은 승리에 따라 프랑스 혁명 세력은 두 번에 걸친 포고령 (Propaganda Decree)을 발표했다. 이 포고령은 자유를 획득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고 돕겠다는 것으로, 이는 혁명 수출을 뜻하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이제 왕의 운명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강경파 생쥐스(Louis-Antoine de Saint-Just: 1767-1794,혁명 당시 군인 및 정치가)는 왕이라는 자체가 범죄이므로 재판 없이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깨끗한 통치는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왕을 변호하는 저명한 변호사가 있었지만, 왕은 반역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는 1793년 1월에 기요틴으로 목이 잘리고, 그가 죽은 후 1년도 안 되어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도 처형되었다.

    왕의 처형은 혁명의 수출을 두려워한 영국, 프로방스 연합(United Provinces:  네델란드 북부지방), 스페인, 사르디니아(지중해상의 섬)로 하여금 오스트리아-프러시아의 동맹 편에 서게 했다. 이에 따라 제1차 대 프랑스 동맹(the First Coalition)이 맺어진 것이다. 오-프러시아 동맹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라인란트를 넘어 프랑스를 공격했다. 프랑스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총동원령은 내부의 저항을 불러와 프랑스 서부 방데(Vendee) 지역에서는 반혁명 반란이 일어났다. 이제 프랑스는 내우외환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고 생필품 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했다.

    1793년 5월 31일, 8만 명의 폭도가 혁명의회에 침입했다. 그들이 온건파인 지롱드의 체포를 요구하자 의회로부터 지롱드 당원들이 탈출하였다. 마르세이유, 보르도, 리옹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뚤롱 항은 영국이 점령했다. 폭도와 합세한 좌익은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다. 좌익(Mountain)은 온건파인 브리쏘(Jacques Pierrre Brissot, 1754-1793) 파와 대립하고 공포정치를 지지했다. 마운틴은 국민투표 없이 왕을 처형하자고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는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절망은 반역과 같다."라는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관점은 그 특성상 군주주의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의회를 장악한 좌익은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를 장악하는데, 이 위원회는 로베스삐에르의 공포정치 기간 중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1793년 여름부터 1794년 여름까지 계속된 공포정치 기간 중 4만 명이 처형되고, 프랑스를 휩쓴 내전으로 40만 명이 죽었다. 의회의 많은 의원들이 이제 프랑스는 내우외환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외적과 싸우기 위해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모든 시민은 군인이며 모든 군인은 시민" 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1793년 9월 5일, 포고령 "오늘의 질서"가 공포되었다. 곧이어 검문법(Law of Suspects)이 공포되어 누구든 검문을 할 수 있고 체포할 수가 있게 되었다. 10월 10일 헌법이 정지되고 "평화를 회복할 때까지 혁명"임을 선언했다. 세 차례에 걸친 물가안정법을 통해 곡물, 밀가루, 버터, 식용유, 브랜디, 석탄, 초, 소금, 담배의 가격을 동결하고 임금을 규제했다. 정부는 전쟁 물자를 징발하고 공격에 미온적인 장군들을 처형했다. 지방의 반혁명 세력과 연방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탄압과 대대적인 처형에 나섰다. 1794년 6월 10일 소위 대공포(the Great Terror)의 출발점이 되는 5월 22일 법(the Law of 22 Prairie)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단심제로 피고인의 방어권은 박탈되고 죄의 입증을 위해 증거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7주간 이 법으로 재판을 받아 처형된 사람 수가 앞선 14개월 동안의 숫자를 초과할 정도였다.

    이처럼 무자비한 재판은 좌, 우익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좌익은 경제 개혁과 무신론 채택을 우선해야 한다고 했고, 온건파인 당통은 외적과 내부의 적이 분쇄되었으므로 공포정치를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기요틴으로 목이 잘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정치를 반대하고 자신들 역시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공포정치의 주인공인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립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공포정치의 성공이 공포정치의 패망을 가져온 것이다. 혁명력 테르미도르 9일에(Thermidor: 그레고리력으로 7월 19일부터 8월 18일까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 등 공포정치의 주역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제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역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혁명재판소를 해체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쟈코벵 클럽을 폐쇄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지지자였던 파리코뮌과 공안위원회, 군대 및 정부에 파견되어 있던 쟈코벵들을 숙청했다. 이 기간 중 로베스피에르 치하 최악의 학살자였던 카리에르(Jean-Baptiste Carrier)를 비롯해 70명이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카리에르는 “공화 세례식”이라는 처형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학살자였다. 반혁명 봉기가 있었던 방데 지역에는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1794년 12월 그동안의 경제 통제를 풀자 인플레가 폭발하였다. 화폐 가치가 폭락하자 세금 납부를 현금이 아닌 물납으로 바꿨다. 지폐 발행을 중단했지만 화폐의 실질 가치는 명목 가치의 2.5%로 줄어들었다. 채권자, 고정수입자, 임금수입자가 붕괴되고 경제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었다. 1795년 봄 군중들은 다시 혁명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5월 그들은 의회를 점령하고 의사당을 향해 대포를 조준한 다음, 이를 저지하는 부의장의 목을 잘랐다. 의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폭도들을 진압했다. 폭도들이 분쇄되어 혁명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로베스피에르 잔존세력과 공포정치, 공포정치의 모든 산물이 프랑스 전역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테르미도르 주역들은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정교한 새 헌법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5명의 집정관으로 구성되는 집정부(Directory)가 구성되었다. 집정관은 선거를 통해 매년 한 명씩 바꾸도록 했다. 선거를 통해 입법권을 갖는 5백인회(Conseil des Cinq-Cents: 하원)와 그 입법권에 대한 거부권을 갖는 원로원(Conseil des Anciens: 상원)도 구성되었다. 또 프러시아, 프로방스 연합, 스페인과의 평화도 이루어졌다. 모로(Jean Victor Moreau), 줄당(Jean Baptiste Jourdan),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독일과 이태리를 공략하고 사르디니아와 오스트리아에 압력을 가하여 전쟁에서 손을 떼게 했다. 그러나 좌,우익 모두 집정부에 불만을 표시하고 부패와 이기주의라는 구실을 들어 집정관들을 공격했다. 1795년 10월 왕당파는 자유선거를 내세워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했지만 공격적인 사령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좌익으로부터의 협박은 언론인 바뵈프(Francois-Noel Babeuf)가 주도했다. 그는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한 사람으로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토지의 분배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1796년 그는 남아 있는 자코뱅 무리와 함께 봉기를 시도했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체포, 처형되었다.

    집정부는 탐욕, 부패, 권력에의 집착이라는 이유로 계속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더욱더 군대에 의존했다. 마침내 혁명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젊은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하였다. 그는 1799년 11월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리고 1804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 많은 세월에 걸쳐 전쟁과 궁핍, 수많은 죽음 끝에 얻은 것은 절대왕정보다 더 가혹한 독재라는 것을 이제 프랑스 국민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구체제(Ancien Régime)의 몰락

    역사학자 테인(Hippolyte Adolphe Taine, 1828-1893)은,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계몽주의자(philosophes)들 때문으로 보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 비판을 통해 구체제의 근본을 뒤흔들고, 부당한 법률이나 전제적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 폭풍우처럼 맹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계층의 출신들이었다. 몽테스퀴외는 귀족, 볼테르는 중산층, 루소는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프랑스가 계몽주의 중심지였지만 그곳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는 존 로크, 아담 스미스, 스코틀랜드의 데이빗 흄, 이태리의 세사르 바카리아(Cesar Beccaria), 프랑스의 몽테스퀴외, 스위스의 루쏘, 독일에는 이마뉴엘 칸트 등이 있었다. 칼 베커(Carl L. Becker, 1873-1945: 미국 역사학자)는 계몽주의자들을 중세의 신학자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신앙을 통해 사후의 천국을 건설하겠다고 한데 비하여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하여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존 로크는 교육은 바로 생산요소의 하나라고 했다. 디드로와 달람베르(Jean Rond d'Alembert)가 편찬한 백과사전은 계몽주의 정신, 즉 지식을 전파하고 사회와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을 기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은 또 이성의 힘을 믿고 교회와 성경을 공격한 사람들이었다. 존 로크나 베일(Pierre Bayle, 프랑스 철학자, 1647-1706) 등은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며 교회를 공격했다. 로크는 자연권 사상을 전파하고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백성은 저항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혁명의 이론적 근거인 사회계약론이다. 루소나 몽테스퀴외 등도 부패한 정부에 대한 공격은 마찬가지였다. 몽테스퀴에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에 쇠사슬이 있다" 라고 했다. 루쏘는 일반의지, 즉 공동선을 위한 공동체 전 구성원의 의지가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고 했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의 미신적 요소, 부당한 법률, 조세제도를 공격했고 볼테르는 기독교적 낙관주의(Optimism)야말로 현상고착에 만족해 개혁을 막는 철학이라고 공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몽주의자들은 더욱 과격성을 띠게 된다. 예컨대 로크나 베일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비난했지만 그래도 절제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들어 티리(Paul-Henri Thiry), 돌바크(Baron d'Holbach)같은 사람들은 신을 부정했다. 이 같은 생각은 구체제의 합법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이었다. 혁명의 원인을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18세기 프랑스는 인구의 급증이 있었고 이에 따른 인구의 이동이 있었다. 1700년 1천9백만이던 인구는 혁명이 일어났던 해인 1789년에는 2천4백만 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흑사병 같은 질병이 사라지고 치료방법의 발전, 환자나 빈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정신, 과학적인 영농, 축산 방법의 개선, 감자 같은 새로운 작물의 재배로 이전 세기보다 더 많은 영양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인구 증가의 원인이었다.

    한편 이 같은 인구의 증가는 인구와 식량의 불균형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한계 상황에 놓여 있었다. 30%의 인구가 빈민이었고,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있었다. 혁명 발발은 바로 빵값과 직결된 것이라고 지적한 역사학자도 있다. 예를 들어 1774년의 흉작은 빵값을 50%나 폭등시켰고, 이는 프랑스 전역에 소위 “밀가루 전쟁”이라는 폭동을 불러왔다. 1780년대 들어서도 자연재해로 인한 빵값의 폭등이 있었다. 혁명 발발 1년 전인 1788년에는 가뭄과 한파, 우박 등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로 곡물 가격의 폭등이 있었고, 바스티유가 함락된 7월 14일은 곡물 가격이 가장 치솟은 날이었다. 지난 1세기 간 물가는 65%나 상승하였지만 임금은 그대로였고, 1785년부터 1788년까지 유럽을 휩쓴 불황으로 실업률은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또한 구조적인 재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정부의 세입은 직접세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경작지의 10%를 소유한 가톨릭 승려, 30%를 소유한 귀족은 면세 대상이었다. 교회는 십일조, 즉 개인 소득의 1/10을 징수했다. 승려들은 국왕에게 기부를 하긴 했지만 그 금액 결정은 그들이 했다. 더 심각한 점은 전국에 걸쳐 조세징수관이 징수한 세금의 일부만 정부에 납부한 것이다. 무엇보다 혁명을 당긴 것은 재정 위기였다. 특히 전시에는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등은 국가의 파산에 큰 역할을 한 전쟁이었다. 정부 예산의 25%가 군사비였고, 50%는 채무 상환에 쓰였다. 중앙은행이라는 게 없었던 당시의 재무상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사채에 의존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구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국왕이 모든 합법적인 권력을 독점했다는 점이다. 국왕은 특권의 보호자였지만 동시에 법의 원천으로,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같은 막강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 16세 그 누구도 개혁에 착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귀족들은 직접적으로 왕의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이었다. 루이 15세가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킨 일은 있었지만, 루이 16세 즉위 시 귀족들은 아직도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이 15세가 사망한 이후 귀족들은 권력을 더욱 강화했고, 이 같은 현상을 ‘귀족 계급의 부활’이라고 불렀다. 귀족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있었다. 세금 면제는 물론 일반 백성과는 다른 특별재판소에 의한 재판, 징집 면제와 더불어 전쟁 시 서민의 집과는 달리 그들의 집은 군사용으로 징발될 수도 없었다. 주교, 대신, 대사, 장군 등 가장 특권적인 자리는 오로지 귀족들의 차지였다. 이처럼 구체제 하에서는 귀족이 아니면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고위직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또 나이가 들수록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고, 무반(전통적인 기사계급 귀족)가문과 문반(법률가 등 정부의 고위직)가문은 결혼을 통해 연대함으로써 강력한 반국왕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13개 최고법원의 판사는 바로 귀족들이었으며 왕의 칙령일지라도 이 법원에 등록되지 않으면 그 효력이 없었고, 그 등록 심사는 바로 이들 판사들이 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바스티유 함락이 있었던 1789년 7월 이전에 이미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혁명의 첫 단계는 국왕과 귀족간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루이 15세(1715-1774)나 루이 16세(1774-1792) 모두 혁명이 절실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왕 모두 왕권의 이론적 근거인 왕권신수설이 도전을 받음으로써 개혁이 힘을 잃고 있었다. 루이 15세는 게으르고 쾌락에 탐닉하는 왕이었다. 특히 그는 여자들을 좋아하고 귀부인들의 개인적인 일을 지원했는데 뽜쏭(Jeanne Antoinette Poisson), 뽕빠두르(Marquis de Pompadour)부인의 예가 그것이다. 그의 치세 중 궁정 연회가 끊일 날이 없었고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되고 있었다. 뽕빠두르 부인의 장례 행렬을 보고 그는 "그녀는 좋은 때를 골라 떠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죽은 다음 대홍수가 밀려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745년 그가 마쇼(Jean Baptiste de Machault d'Arnouville)를 재무대신으로 임명하자, 마쇼는 세제 개혁을 건의했다. 새로운 세제 하에서는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는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귀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개혁은 승려 및 귀족 계급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마침내 루이 15세는 개혁이란 오로지 고등법원(Parlements)의 폐쇄와 재판관들을 축출하는 것임을 깨닫고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 년도 못 가 막을 내렸다.

    서기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는 개혁파인 튀르고(Jacques Turgot)를 재무대신으로 임명했다. 튀르고는 귀족의 특권 폐지와 지주에 대한 과세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그들의 특권을 방어하고 튀르고에 저항했다. 튀르고는 전략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개혁할 것을 결심하고 많은 정적들을 바스티유에 투옥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점진적인 개혁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우리 집은 50세가 되면 죽는 집안이다"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의 조급함은 대가를 치렀다. 그는 모략으로 인해 왕비의 지지를 잃고 실각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만이 혁명을 막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옳았고 또 자신의 예언대로 54세에 죽었다. 튀르고의 해임은 "뿌리 깊은 특권을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 준 역사적인 예이다. 

    튀르고의 뒤를 이어 네커(Jacques Necker)가 임명되었다. 그는 우선 세출의 축소와 고이자율의 채무를 줄여 재정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는 또 매관매직으로 거래되는 모든 공직을 조사했다. 당시 프랑스의 공직은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때였다. 그의 노력으로 국왕의 금고는 흑자로 돌아섰고, 그는 재정의 구세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자 루이 16세는 그를 해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칼론은 모든 토지, 즉 교회와 귀족 소유의 토지에 대한 토지세의 신설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귀족원(Assembly of Nobles)내에는 많은 칼론의 적들이 있었고, 이들은 칼론의 개혁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왕은 칼론을 해임하는데,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칼론의 후임으로 왕은 칼론의 적이었던 귀족원 의원 브리안을 임명했다. 그는 의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국왕은 비협조적인 귀족원을 설득, 확대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브리안의 이 같은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구체제는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왕은 1614년 이래 폐쇄되었던 3부회의를 소집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루이 16세는 상황을 해결할 능력도 상상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양심적인 국왕이긴 했지만 결단력도 없었고 정치적인 능력도 없었다. 그는 지극히 사적인 사람으로 사냥과 연회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로서의 부실한 역할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도 군주인 남편의 명예를 훼손하는 데 한 몫을 했다. 그녀는 사치하고 고집이 센데다가 경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숙적인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므로 더욱 인기가 없었다. 그녀는 많은 일에서 프랑스보다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에 관심이 컸다. 어느 성직자가 그녀에게 줄 선물로 산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사치함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사건이었다. 루이 16세와 그녀는 왕가와 백성 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왕의 일차적인 의무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으므로 군사적, 외교적 패배는 그의 책임이었다. 18세기에 프랑스는 여러 번에 걸쳐 굴욕적인 군사적 패배를 하였다. 1757년에 프러시아에 패한 로스바하(Rossbach)전투가 하나의 예이다.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1733-1735),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1756-1763)에 참전했지만 어느 것도 승리한 바가 없었다. 오히려 해외 식민지만 잃었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756년에 있었던 숙적 오스트리아와의 동맹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 동맹은, 원칙으로 보면 거대한 동맹이었지만 실제로는 파멸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인 동맹국들을 지원할 수 없었던 것도 치욕이었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가 폴란드 분할을 할 때 그리고 러시아가 터키령 크리미아반도를 점령한 때 프랑스는 수수방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1787년 프러시아가 프로방스 연방(네덜란드 북부 지방)을 침범했을 때도 프로방스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패배는 프랑스의 위신을 깎아 내린 것이다. 영국과 체결한 에덴관세인하 협정(the Eden Treaty of 1786)도 프랑스의 실업과 불경기를 부채질한 원인으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비난을 샀다. 이 같은 군사적, 외교적 실패에 대한 백성의 반응은 조롱, 분노, 왕실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왕실에 대한 군대의 반감 역시 다가올 혁명에서 한몫을 하였다.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군대는 프로방스 지원을 위한 파병에 반대한 왕에게 분노했다. 혁명이 발발했지만 왕은 자신의 군대에 의존할 수 없었다. 군중들에 발포를 명령하면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군대로부터 듣게 된 것이다. 군대는 또한 야전에서 왕에게 충성을 한 것이 아니라, 삼부회의의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이익 침해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삼부회의 귀족석 278석 가운데 현역 및 제대 군인이 221명이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유일한 군사적, 외교적 성공은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이었다. 루이 16세는 재정 형편상 미국 독립전쟁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튀르고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원에 나섰다. 이 전쟁에 대한 지원비는 프랑스의 1년 세입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지원은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전쟁을 본 백성들은 전제적인 왕과 부당한 법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과 전제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3. 공포 정치(the Terror)

    공포정치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지롱드 당원을 처형한 1793년 6월 2일부터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1794년 7월 27일까지로 보고 있다. 체포와 구금, 처형이 일상화되었던 기간이다. 이 기간 중 1만7천 명이 혁명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고 혁명-반혁명 파간의 내전에서 항복한 반혁명 포로 1만2천 명을 죽였다. 또 다른 1만 1천 명이 재판을 기다리다가 죽었다. 공포정치 기간 중 4만여 명이 처형된 것이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시인 앙드레 셰니에르(Andre Chenier), 현대 화학의 창시자 라봐지에, 철학자 겸 수학자 카리타(Marie de Caritat) 그리고 많은 아카데미 회원, 파리 시장, 지롱드 당원, 당통 파(Dantonistes), 헤베르 파(Herbertistes)가 처형되었다. 죽은 자의 84%가 제3계급 출신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비인도적인 처형을 프랑스 역사가 테인(Hippolyte Adolphe Taine, 1828~93)은 “피로 쓴 정치 철학”이라고 했다.

    공포정치의 원인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당연한 결과라든가 혁명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외적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혁명 성공을 위한 저항세력의 분쇄를 위해 공포정치가 불가피했다는 관점이다. 1793년 봄 현재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스페인, 영국, 프로방스, 사르디니아와 전쟁 중이었다. 많은 전선에서 프랑스 혁명군은 패배를 하고 있었다. 전투를 기피한 장군도 있었고 영토가 적군에 점령당한 곳도 있었다. 훈련도 엉망이었고 상관 폭행도 빈번했다. 설상가상으로 혁명-반혁명 간의 내전도 있었다. 국민개병에 의한 징병은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새로운 성직자법에 대한 반대와, 왕에 대한 처벌도 반대에 부딪혔다. 많은 지역이 혁명의회의 정책 및 권능에 도전했다. 서부 방데(Vendee) 지역에서는 왕정을 지지하는 5만 명의 반혁명군이 '예수의 성 십자가' 기치 아래 혁명군에 저항했다. 파리의 권력 집중을 반대하는 연방주의자들도 반혁명 대열에 섰다. 리옹, 마르세이유, 보르도 등 지방 대도시들도 혁명의회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왕당파는 뚤롱 시를 적군 즉, 영국군 수중으로 넘기기도 했다. 공포정치는 이 같은 반혁명 세력 분쇄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임시지폐(Assignats)는 가치가 폭락하고 연료, 식품 등은 동이 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793년을 맞았다.

    이 같은 위기에 직면한 혁명 측은 권력의 파리 집중을 서둘렀다. 온건파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이 제거되고,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c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 프랑스 변호사, 혁명가)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이 등장하였다. 이 급진 좌파들이 혁명의회(Convention) 및 오만한 권력기구인 공안위원회를 장악하였다. 정책 수행을 위해 정부 각 부처로 위원들을 파견했다. 공안위원회가 국가 운영을 장악한 것이다. 1793년 겨울 공안위원회는 의회도 장악했다. 경찰권도 장악했다. 12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공포정치 기간 중 프랑스를 통치했다.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조자들은 “도덕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했다. 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여덟 명의 변호사, 두 사람의 엔지니어, 성직자 한 사람, 배우 한 사람 등 12명이었다. 그 중 귀족 1명, 하층 계급 1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문가 출신들이었다. 4명이 20대였고 마흔 살을 넘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 위원회 내에서 특별한 업무를 담당한 사람도 있었지만 혁명에 대한 책임은 모두 똑 같이 졌다.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분자는 죽음뿐"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흑과 백의 타협을 시도하는 어리석은 궤변가" 로 매도했다. 전쟁과 평화도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 "평화 시 시민정부의 근거가 도덕이라면, 혁명 시 시민정부의 근거 역시 도덕과 공포이다. 공포가 없는 도덕은 악이며, 도덕이 없는 공포는 희망이 없다. 공포는 다만 정의이며, 도덕의 산물이다" 라고 했다. 9월 5일 혁명의회는 "공포는 오늘의 질서’" 라는 법령을 정하고 평화를 달성할 때까지 프랑스는 혁명 상태임을 선언했다.

    서기 1793년 8월 23일 의회는 총동원령(Levee en Masse)을 내렸다. 18~24세의 미혼자는 징집되고 기혼자는 탄약 및 군수품 제조와 운반에, 여성들은 군복 및 텐트의 제조에, 어린이들은 붕대의 제조에 투입되는 법이다.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원의 동원 등 경제도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물자를 징발하고 전쟁 필수품에 최고 가격을 매겨 유통을 억제했다. 그밖에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84명의 장군을 처형했는데, 이는 전사한 장군 수를 능가하는 숫자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1793년 말쯤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선에서 적을 격퇴할 수가 있었다. 1794년 봄에는 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라인강 좌안을 점령할 수 있었다.

    서기 1794년 봄에는 방데 지역의 반혁명군과 연방주의자들을 무찔렀다. 무자비한 방법으로 가차 없이 포로들을 처형했다. 예를 들어 리옹 지방에서는 1천7백 명에 달하는 반혁명 포로들을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대포를 쏴 학살했다. 도시의 이름들도 새로운 이름(Ville affranchie: 해방 도시 등)으로 바꿨다. 전국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툴롱에서는 1천1백 명의 시민이 한 번에 총살되기도 했다. 서른두 명의 부녀자, 아이들이 생매장되기도 했다(Gonnord). 낭트에서는 소위 "공화국 세례식"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수장하기도 했다.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물에 독을 탄다거나 폐광에 감금하고 독가스를 뿌리는 방법도 혁명군의 아이디어였다. 지옥의 군대라는 이름의 혁명군은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죽이고 파괴할 수 있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곡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방데를 폐허로 만들고 그 주민의 1/3을 죽였다. 방데'라는 이름을 복수(Venge)라는 이름으로 바꾸기도 했다.

    서기 1793년 9월 혁명의회는 반역자 색출을 위한 일련의 법률을 공포하였다. 혁명에 비협조적인 사람은 누구나 체포할 수 있는 법률이다. 이 법은 그 기준이 모호하여 누구나 체포될 수가 있었다. 왕정지지자, 연방주의자, 신분을 명확히 입증하지 못하는 자, 신분증 불소지 자, 퇴직공무원, 귀족 및 귀족의 친척, 망명자의 친척, 혁명에 충성한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자 등등 모두 체포될 수가 있었다. 이 법에 따라 약 30만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악법은 혁명 헌법(the Law of Frimaire)으로, 이 법은 권력의 파리 집중과 법의 제정 및 공포를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법에 의거 경찰을 제외한 모든 정부기관은 공안위원회의 지휘를 받게 된다. 1794년 6월 테러의 강화와 혁명재판소 개혁을 위한 법(the Law of 22 Prairial)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모든 재판은 파리에서 하되 피고인의 합법적인 변호권은 박탈되고 유죄 입증을 위한 증거는 필요 없으며, 시민의 적이라는 모호한 말로 무죄 아니면 사형이라는 오직 두 개의 판결만을 정하고 있었다. 도덕과 법을 동일시하고 재판을 형식적인 것으로 격하시킨 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6주 반 만에 파리에서 1,376명이 처형되었다. 지방으로부터 죄수들이 압송됨에 따라 파리의 감옥과 재판소는 죄수들로 가득했다. 집단 재판(Fournees)이라는 것이 행해졌고, 한 번 판결로 60명을 재판한 경우도 있었다. 대공포(the Great Terror)의 기간으로 불린 7주 동안 처벌된 사람 수가 앞선 14개월 동안 처벌된 숫자를 훨씬 넘어설 정도였다.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 학살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충분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학살의 원인으로 혁명적인 감정에 토대한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든다. 혁명가들의 오만한 자기 확신 또는 인류를 바꿀 수 있다는 맹목적이고 광적인 확신 등 종교적인 열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혁명의회는 새 공화국 질서 확립을 위해 단두대는 물론, 시민들로 하여금 구질서의 제거라는 의식을 갖도록 혁명 문화를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어 구달력을 폐지하고 1년을 열두 달, 한 달을 열흘씩 3등분하는 새로운 혁명력을 채택하기도 했다. 구체제보다도 더 엄격한 검열을 시행했다. 가톨릭 세례명도 개명하고 승려 제도와 교회의 폐쇄, 종교적 상징물의 파괴, 가톨릭 기념일의 혁명 기념일로의 전환 등도 이루어졌다.

    이 같은 폭력은 그러나 좌, 우익 모두로부터 저항을 불렀다. 공안위원회 강경파인 로베스피에르도 미신 타파를 명분으로 한 비기독교화를 비난하고, 무신론 그 자체가 종교라고 비난했다. 그는 초월적 존재를 믿은 사람으로 비기독교화 조치는 신성모독이라고 했다. 공안위원회 급진 좌익인 헤베르(Jacques Rene Hebert, 1757-1794: 언론인)는 중소 상공인 계층의 대변자로 파리 코뮌의 지지를 받고 로베스피에르와 대결했다. 그는 검열법, 물가안정법 지지자로 무신론을 지지하고 계몽주의자들의 이성론을 믿었다. 그러나 1794년 그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온건파인 당통은 공포정치를 완화할 것을 주장하고 역시 공안위원회의 정책을 비판했다. 혁명군의 승리에 따라 이 같은 공포정치를 완화할 것을 많은 사람들이 요구했다. 의회의원인 튀리오(Jacques Thuriot)는 "우리를 야만으로 되돌리는 이 같은 폭력은 저지되어야 한다" 라고 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동료였던 데무렝은 "자유롭고 번영된 공화 프랑스는 한 방울의 잉크, 한 대의 기요틴으로 족하다."라고 했다. 지나친 폭력을 반대한 것이다. 당통 역시 공포에 토대한 공화국 창설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로 1794년 4월 당통과 데무렝은 단두대로 처형되었고 곧이어 그 아내들도 처형되었다. 왕의 변호에 나섰던 변호사 말레쉐브도 그의 딸, 사위, 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파리 시장과 파리 대주교도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이어 공안위원회는 정부의 각 부처를 폐지하고 그 대신 그 업무를 공안위에 보고하는 위원회를 두었다. 파리 코뮌도 장악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는 모든 비판자들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내전에서 혁명군이 승리함에 따라 더 이상의 공포정치가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초월자 신봉을 혐오하고, 그의 부패에 대한 지나친 증오에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다. 공안위원회 내부의 의견도 갈리고 있었다. 고등법원을 증오하고 헤베르의 처형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당통의 처형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로베스피에르는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공포와 그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이제 비판자들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게 한다. 공화력 테르미도르 9일(July 27, 1794), 마침내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에서 축출된 후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그는 지지자들에 의해 잠시 석방되었지만 곧 다시 체포되어 그날 저녁 바로 단두대로 처형되었다. 그는 그가 임명한 파리 코뮌 위원들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어서 혁명정부는 해체되고 1795년 집정부(Directory)가 창설될 때까지 테르미도르 반동 주동자들이 전권을 장악하였다. 수천 명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로베스피에르 일당에 대한 처벌과 자코뱅 클럽 폐쇄, 로베스피에르 지지자였던 파리코뮌 요원 70명을 처형하였다. 물가안정법(Maximum)을 폐지하고 공안위원회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왕당파의 백색 테러가 부활하여 자코뱅 민병대를 학살하였다. 테르미도르 주동자들은 공포정치의 주동자들을 모두 단두대로 보냈다. 공포정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카리에, 혁명재판소의 처형자였던 텡빌을 포함하여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 108명이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혁명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남의 목을 잘랐던 사람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목이 잘린 것이다. (c) 

    박흥서 글
 
    참고 자료: 1.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People by David Abdress.
               2.The French Revolution by Linda S. Frey and Marshall L. F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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