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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멸망


      왕조의 멸망


        프랑스 대혁명(1789), 러시아 혁명(1917),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동학 혁명(1894)은 모두 왕조의 멸망을 가져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사건들의 핵심은 개혁이었으며,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혁명의 당사자로 처형된 루이 16세는 개혁을 원했지만 특권적인 교회와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는 결국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러시아 알렉산더 III세와 니콜라스 II세는 알렉산더 II세의 개혁을 되돌려 놓은 반개혁 황제들이었다. 자신을 학대한 부친을 죽인 혼외정사의 아들 스메르자코프 카라마조프를 통해, 혼외자식 학대하듯 백성을 학대하는 황제는 언젠가 백성들의 손에 죽을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암시하지만 황제는 알아듣지 못했다. 니콜라스 II세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 1918년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청조는 한족에 대한 차별과 서구 열강의 침탈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아편전쟁(1839-1842)에서 영국에 대한 굴욕적인 패배와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결국 홍수전의 반란(1850-1864)을 불러왔다. 수많은 민란을 간과했던 청조는 뒤늦게 개혁(양무운동)에 손을 댔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나마 보수 세력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받았다. 양무운동(1861-1894)은 또 백성을 위한 당장의 시급한 개혁이 아닌, 초점을 벗어난 장기 부국강병 개혁이었다. 홍수전의 난으로 국력이 약화된 청조는 결국 막을 내린다.

        동학 혁명(1894)은 갑오경장이라는 개혁을 가져왔지만 이 역시 때가 늦어 미구에 왕조가 멸망하는 것이다. 시기를 잃은 개혁은 오히려 위기를 부른다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프랑스 역사 학자)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 이 네 사건들의 공통점은 개혁이고, 개혁에 실패함으로써 한 왕조의 몰락은 물론 인류 역사가 바뀐 것이다. 모두 양보를 모르는 놀부, 부유한 놀부들의 더 많은 욕심이 스스로의 종말을 불렀던 것이다. 아래의 글은 당시 백성들의 삶의 편린으로 개혁이 왜 필요했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답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현재 대부분의 프랑스 농민들은 바닥이 더러운 한 칸 또는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어둡고 통풍이 안 되는 집안에는 가축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불결한 환경은 질병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의 농촌 여인들의 1/3이 중노동의 결과 사산의 경험이 있었으며 신생아 20명당 한 명이 사산이었다. 많은 신생아가 죽으니 신부를 부를 겨를도 없어 산파가 영결세례를 줄 수 있도록 자격이 주어지기도 했다. 태어나기도 힘들지만 생후 1년 이내에 1/5이 죽었다. 빈민 지역에서는 1/3이 죽었다. 살아남은 아이의 반은 15세 이전에 죽었다. 영아의 40%가 8월부터 10월 기간에 죽었다. 어머니의 일손으로 인해 수유를 못해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다. 농민의 식사는 조잡했고 단백질, 비타민이 든 육류, 신선한 야채는 매우 귀한 식품이었다. 가축은 너무 소중하여 식품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질병 못지않게 농민을 괴롭힌 것은 경작 환경이었다. 반 이상이 소작농이었던 당시의 농민들을 괴롭힌 것은 경작 계약이다. “반 타작 (half-fruits)”이라고 불리었던 이 경작 계약은 이렇다.

      

      - 단두대 아래 루이XVI세 -

        농민은 지주와 보통 1년짜리 경작계약을 했다. 우선 실물로 지불하는 임차료를 보자. 임차지에서 기르는 모든 가금류, 가축류의 반과 이 동물들이 생산하는 달걀이라던가 우유의 반은 지주의 것이다. 또 성 요한의 날 등 무슨무슨 날에 달걀이라던가 닭고기 등 계약상의 실물납을 해야 했다. 경작지는 중세 이래의 경작 방식인 3포제로 1/3은 경작을 쉬는 휴경지, 1/3은 밀이라던가 보리 등 곡물, 나머지 1/3은 콩, 채소 등의 작물을 경작했다. 이는 강제 계약으로, 만일 소작인이 휴경지 이외의 땅을 놀리는 경우 지주는 그 놀리는 땅을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줄 수가 있었다. 소작료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300평의 소작지의 경우 100평은 휴경지, 다른 100평은 곡물, 나머지 100평은 채소 생산을 담당한다. 당시의 경작 환경으로 인해 100평의 곡물 경작지의 실제 생산 가능한 토지는 평균 80~90평 정도였다. 여기서 생산된 생산물을 100으로 볼 경우 20은 빌린 종자용 씨앗 상환 몫, 20은 계약금, 수확 및 타작 비용 10을 제외하고 난 나머지 50의 반 25를 임차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지주로부터 빌려 쓴 농기구에 대한 임차료도 지불해야 했다. 토지의 유지 관리에 드는 비용도 모두 소작인이 지불해야 했고 세금, 지방 토후에게 바치는 공물, 교회에 내는 십일조 등도 납부해야 했다. 이것저것 공제하고 나면 소작인의 몫은 평균 수확의 15%에 불과했다. 이처럼 농민 계층은 귀족 계급의 등쌀로 뼈가 으스러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가혹하게 보이는 계약은 그래도 소작인에게 상당히 유리한 계약이었다. 이러한 계약은 보통 25정보 이상의 대규모 토지로, 소득률이 작아도 수확량이 크기 때문에 먹고 살 수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작지의 40~45%가 농민 소유이긴 했지만, 80%의 농민들이 영세농이었다. 1789년 현재 30%의 인구가 빈민이었고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작지의 10%를 소유한 가톨릭 승려, 30%를 소유한 귀족은 면세 대상이었고 교회는 또 십일조를 징수했다. 이 같은 상황은 개혁을 절실히 요구했지만 국왕, 승려,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 보호를 위해 개혁을 거부했던 것이다.

        농노해방이 있었던 1861년 현재 러시아 인구는 총 6천만 명이었다. 이 중 1천2백만이 자유인, 나머지 4천8백만 명은 국가에 예속된 농노(Obrok)와 개인 지주에게 예속된 농노(Barshichina) 등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개인에게 예속된 농노는 전체 인구의 37.7%였다. 이들은 소작료를 납부하는 소작 농노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력 농노로 나뉘었다. 14세 이상은 누구나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18세기 말에는 주 3일의 노동으로 제한했지만 지켜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1830년대 니콜라스 I세는 국가 예속 농노들을 관리하기 위해 농노청을 두고, 이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또 자치기구를 만들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여행을 하려면 여행증명서가 필요하긴 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자유농으로, 남성 인구의 대략 30-40% 정도였다. 이처럼 국가에 예속된 농노는 그래도 조금은 자유롭고 부담도 적었다. 그러나 개인에게 예속된 농노는 달랐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황제와 신하 관계의 축소판이었다. 지주는 자기 소유 농노에 대한 모든 권한이 있었다. 기근이나 흉작 시 지주는 농노를 보호하고 도왔으나 또한 징벌권도 있었다. 태형, 사형을 비롯해 시베리아 유형을 시킬 수도 있었다. 지주는 자신의 토지 내에서 사실상의 황제였다. 농노는 일종의 재물로, 선물로 주고받거나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농노의 경작지는 대부분 거친 땅으로 중세 이래의 경작 방식인 다품종 밀집 경작 농지(open-field with multi-strip)가 대부분이었고 영농기술은 후진적이었다. 노동 능력, 성별, 나이에 따라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해야 했으므로 경작지의 분배는 정기적으로 재조정해야 했다. 19세기 들어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제한된 경작지를 재조정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농노제도가 집중적으로 시행된 지역은 농노제도가 시작되었던 제국의 중앙 지역과 폴란드 분할로 획득한 서부 지역이었다. 이 서부 지역 인구의 반이 농노였다. 북부, 동부, 시베리아 지역은 농노제도가 실시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산업화에 따른 농업부문의 희생은 1890년대 기근을 비롯해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불러 왔다. 1900년 어느 날 폴란드 로즈(Lodz)시 거리의 모습이다. 

    - 니콜라스II세 가족-

“어깨가 축 늘어진 행인들이유령처럼 걷고 있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여인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굶어, 술이 취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같은 시간, 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누워있었다. 며칠 동안 굶었고, 갈 곳조차 없었다. 또 바로 그 시간에, 12세 소년, 21살의 처녀, 55세 남자가 굶주림으로 쓰려져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만 하루 5명이 굶주림으로 그렇게 쓰러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었을까? 빵과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  -From Lodz's Development-

        청조 멸망의 원인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은 가뭄, 홍수, 기근, 역병 등으로 절망 상태에 있던 백성들이 일으킨 난이다. 홍수전이 이끈 이 난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했던 것으로, 천년 왕국이라는 신비적인 요소를 담고는 있었지만 후일 중국 근대화의 초석이 된 아편금지, 도박금지, 담배 및 음주 금지, 일부다처제 금지, 노예제 금지, 매음 금지 등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들은 남녀평등을 외쳐 전족과 중매결혼 금지를 주장하고 실제 실천하기도 했다. 토지의 개인 소유금지와 공평한 분배를 내세웠다. 이 같은 병폐들은 당연히 개혁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었다. 홍수, 한발,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했고 이에 따른 크고 작은 농민봉기가 잇따랐지만 청조는 태만과 무기력으로 문제해결이 불가능했다. 홍수전의 농민군은 삽시간에 그 세력이 불어나 양자강 일대를 장악하고, 1853년에는 남경을 함락한 다음 수도로 정하고 3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그 치세 하에 둔다. 

      - 태평천국의 난 -

        그러나 1864년 홍수전이 사망함으로서 그의 군대는 항복한다. 그의 화장된 유골은 대포에 담아져 발사되는데, 이는 반란에 대한 처벌로 그의 영혼이 영원히 안식을 못 찾도록 한 청조의 징벌이었다. 이 싸움의 희생자 수는 대략 3천만 명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2차대전 희생자 6천만 명 다음이다. 청조는 뒤늦게 양무운동을 일으켰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국력이 약화된 청나라는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붕괴된다.  (C)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참고자료: 1. Franz Michael. "The Taiping Rebellion 1851-1864."

           2.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People by David Abdress.

             3.The French Revolution by Linda S. Frey and Marshall L.

               Frey.

             4. The Russian Chronicles by Norman Stone and Dimitri

                Obolensky

             5. Understanding Imperial Russia by Marc Raeff.


    글: 박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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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멸망



      러시아 제국의 멸망


1. 개혁

    러시아 제국의 멸망 전 50년은 농노 해방으로 시작된다. 1861년 2월 9일 농노해방 선언이 있었다. 표면상 대개혁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2천만 명 이상의 농노가 자유를 획득하였다. 이들의 무산 계급화를 방지하기 위해 해방된 농노들에게는 한 사람당 약간의 토지가 주어졌다. 그 대신 농노의 소유주들이었던 지주들에게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가 면제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지방 행정기구의 미비로 지방의 질서 및 행정은 지주들의 책임이었다. 지주를 대신한 지방자치행정기구(Zemstvo, local assembly)는 1864년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다. 젬츠보는 선거로 뽑은 지방의 유지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경찰 업무, 행정, 보건의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들의 권한은 제한된 것이었다. 그 활동 역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었고, 또 조세부과권 역시 정부 소관이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젬츠보를 이용하려고 했고, 이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방행정기구의 재조직과 더불어 사법제도의 개혁이 있었다. 배심원 제도와 판사의 영구직, 양심적이고 유능한 재판관 선정 등 정부는 서유럽국가들 보다 더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재판 제도를 확립하기도 했다. 피고인의 인격 존중과 변호사 선임권으로 원고와 공정한 다툼이 가능하도록 했다. 변호인에 관한 규정은 재판 절차의 수준을 높여, 재판을 공개하여 방청객이 재판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했다. 형사법에 심리적인, 사회적인 고려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농민들은 이 같은 새로운 사법제도의 밖에 있었다. 농민이 당사자인 재판은 특별법원의 소관이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일반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현대적인 민법전의 미비로 지방재판소는 관습법에 의존했는데, 관습법은 지주 위주였으므로 농민들은 재산권의 보호가 매우 어려웠다. 이 같은 법적 차별은 개혁의 한계를 노출시켰고 또 농민은 물론 농민 편에선 인텔리겐챠들, 예컨대 젬츠보의 구성원인 자유주의자나 인기영합주의자들로부터 적대감을 샀다.

    알렉산더 II세의 마지막 개혁은 1874년의 군 개혁이다. 병사는 원래 농민과 하층 계급으로부터 징집되었다. 살아남은 자는 제대 후 자유민이 되었다. 농민은 다른 농노로 대신 복무케 하여 징집을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이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군 제도를 단기 복무를 토대로 한 국민개병제로 바꾼 것이다. 국민개병제로의 개혁은 농민을 시민사회로 통합하고 현대 문화를 대중에게 전파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문맹의 병사들은 읽고 쓰는 교육을 받았고, 현대적인 장비를 다루고 기술을 익힐 수가 있었다. 배경이 다른 수많은 병사들이 동료의식을 기르기도 했다. 복무 기간이 짧았지만 제대군인들은 군에서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대전 때까지 러시아는 유능한 야전 장교와 하사관을 자랑하는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알렉산더 II세(1885~81)치세 중 단행된 개혁은 가난하고 뒤떨어진 러시아에서 보수적인 정부가 이룩한 놀랄만한 성공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앞선 서유럽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같은 개혁은 또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에 불을 지폈고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폭력이나 천지개벽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몇십 년에 걸친 상황을 관찰해 보면 이 초기의 성공이 오히려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개혁은 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 현대 사회의 성격을 잘 못 판단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현대화로 인해 고삐가 풀린 동적인 힘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농노 해방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심각한 문제를 암시하고 있었다. 해방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당장의 필요에는 충분한 땅이었으나 농민의 증가에 따라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1861년 개혁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자본의 부족과 전통적으로 해온 토지 분배의 재조정이라는 관습(인구 증가에 따른 정기적인 재분배) 때문에 새로운 영농기술을 적용하기가 어려웠고, 이에 따른 토지효율의 하락은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왔다. 따라서 농민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토지를 요구했고,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 농민 봉기의 원인이었다. 농민과 농민 편에선 사람들은, 농민들에게 경작 가능한 모든 토지의 분배만이 해결책임을 내세웠다. 한편 농노의 해방으로 땅을 잃은 대지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노와 토지를 잃은 대가로 정부가 준 보상금을, 경험 부족으로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 역시 중대한 문제였다.

    행정적, 재정적인 이유로 1861년 농노해방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조세의 징수를 지방 공동체의 책임 하에 두고자 한 것이었다. 이 제도하에 농민은 마을 전 주민의 승인 없이는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고, 이 승인을 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마을을 떠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타 지역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여행증을 마을 공동체가 발급했고, 그가 돌아와 세금을 납부한다는 게 확실해야만 여행증을 발급했다. 이 같은 노동력 이동의 제한으로 러시아 내륙에는 농업 인구가 넘쳐났다. 20세기 들어와 자유로운 노동력 이동을 허락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악화되어 농업 인구 증가로 인한 토지의 재분배가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다. 농지 확대를 위한 시베리아로의 농민 이주로는 당장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제국의 행정을 위해 만든 기본조직 젬츠보는 자신들이 국민의 대표라는 생각을 했고 교사, 보건요원, 기술자, 호구조사요원들과 전국적으로 연대하여 중앙정부와 대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중앙정부는 젬츠보의 국민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지방 행정에 대한)그들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시민사회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정부는 지방 엘리트, 즉 젬츠보와의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농촌의 현대화, 농민의 보건 향상, 새로운 영농기술의 교육 등이 마비되었다. 이 역시 1861년 개혁이 예상치 못한 일로 혁명을 부른 원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전제체제가 그러하듯, 알렉산더 II세 치세 하의 모든 개혁이 군주의 변덕에 좌우되었다는 점이다. 개혁자들은 조정의 실권자들이었음에도 전적으로 황제에게 의존했다. 개혁의 성공 여부는 황제의 열정에 좌우되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자 황제의 개혁 열정은 식었다. 예를 들어, 국민개병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1863년의 폴란드 봉기는 황제와 정부를 놀라게 하여 개혁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의구심을 품게 했고, 이에 따라 초기의 개혁 정신과 신념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1866년 이후, 관료들의 무관심과 황제의 확고한 신념 부족으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지고, 설상가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개혁을 연기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움직임이 싹튼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개혁에 실망한 여러 세력이 움직였다. 학생, 사회주의자, 유물론자, 허무주의자, 비밀혁명조직 등이었다. 문화적, 도덕적으로 대중을 이끌려던 학생들은, 이제 정부에 대한 완전한 적대 세력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개혁을 거부하고 혁명을 통한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정부에 의한 개혁의 힘은 붕괴되고 있었다. 인텔리겐챠들은 혁명주의자들을 지지했고, 지식인들에 대한 정부의 불신은 깊어만 갔다. 정부와 시민사회 간에는 소통이 단절되고 전문가, 사업가, 예술가, 박애주의자들은 모두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여 보다 많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정치에의 참여를 원했다.

    한편 우익들은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열정으로 백성들을 선동했다. 폴란드 봉기가 러시아 쇼비니즘에 불을 질렀듯이, 발칸 전쟁과 중앙아시아 진출은 제국주의와 공격적인 범슬라브주의에 불을 붙였다. 우익들의 선동으로 민족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백성들은 정부의 신중한 외교 정책 및 미온적인 식민지 확대 정책을 부정했다. 자신들이 전제체제의 주체임을 자처한 보수주의자들도 정부의 미온적인 정책에 반대했다. 급진 인텔리겐챠들에 대한 우익의 반격은 러시아 문화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민족적 성격에 관한 백성들의 호기심을 불러오긴 했지만 체제 유지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혁명을 부추기는 선동이 날로 심해지고 "인민의 의지(Narodnaia Volia)"라는 좌익 테러 단체가 결성되면서 이 선동은 정치적 테러로 발전하여 급기야는 1881년 3월 1일, 알렉산더 II세는 이 단체의 테러로 암살된다. 그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입법과정에 시민사회의 참여를 허락할 예정이었다. 급진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부는 '인민의 의지' 멤버들을 전원 체포, 사형에 처했다. 이를 계기로 그 후 10년간 테러와 선동이 잠잠해졌다. 여론도 급진 테러리스트들에게 등을 돌리고 백성들도 생활수준 향상으로 눈을 돌려, 보다 온건한 자세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알렉산더 III세와 그의 아들 니콜라스 II세는 개혁을 중단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했다. 그들은 이미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원상태로 돌리고 소위 반개혁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2. 반개혁(1880~90년대)

    반개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로 대학과 젬츠보이다. 대학과 학생을 통제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검열을 강화하여 지적 활동을 통제·감시했다. 젬츠보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 같은 통제는 시민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조치였고 정치에 시민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도시나 지방을 가리지 않고 그 주민들을 감시했다. 경찰에 의한 이 감시는 점점 도를 더해 갔다. 알렉산더 III세는 지지를 얻기 위해 민병대, 저명인사, 쇼비니즘에 호소했다. 외국인, 비러시아계 러시아인(1897년 현재 러시아에는 170개 종족이 있었다), 중도계층이 그때까지 누렸던 모든 권리는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발틱 지방, 폴란드, 코카서스, 핀란드에서 러시아화가 진행되었으며 유대인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하스칼라 운동(Haskalah: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으로 잠시 자유를 누렸던 유대인들은 포그람(Pograms: 반유대인 폭력)으로 커다란 희생을 치르었다.

3. 산업화.

    이 같은 음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경제는 도약을 한다. 그러나 이 도약은 농업 부문의 희생에 토대한 것이었다. 재정과 통화안정정책에 힘입어 수출이 증가하였고, 1895년에는 경제 잠재력이 산업국가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농업 부문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었다. 농업 부문의 불균형은 1891~92년 기근을 가져왔고, 이는 정부 정책의 빈약함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재난에 직면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아무런 정책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기근과 정부 대책의 부실은 엘리트 계층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자극하기 시작했고 대학,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대중 집회가 다시 일기 시작했다.

    이 같은 경제적, 사회적 위기는 곤궁한 무산대중과 결합하여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 조만간 위기를 불러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지식인들이 위기를 더욱 부추겼고, 역사 발전의 주도권을 둘러싼 맑스주의자들과 인기영합주의자들 간의 논쟁, 이상주의적인 형이상학의 부활, 그리고 마침내는 니체,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등이 주장한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메시지를 담은 세기말 사조(fin de siècle)가 풍미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이제 폭풍우가 닥친다. 농업의 위기로 농민 봉기가 일고, 농민의 봉기는 정치적 테러와 맞물려 더욱 거칠어졌다.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열변으로 농민을 옹호했다. 알렉산더 III세의 반개혁으로 활동 무대를 잃었던 젬츠보의 지도자들은 보수 체제와의 싸움을 지휘하기 위해 나섰다. 정부와 타 종족과의 갈등 역시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혁명으로 발전할지도 모를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니콜라스 II세(1894~1917) 정부는 일본과의 전쟁을 생각한다. 단기간에 승리할 것으로 보았다. 국내의 정치적 동요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애국심에 의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파멸적인 패전은 절대왕정의 물질적, 도덕적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정부와 함께 백성의 몫이었다. 1905년에 들어 군대의 반란과 농민봉기가 절정에 이르자 정부는 한 발 물러선다. 니콜라스 황제는 선거에 의한 의회 수립과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이 약속으로 소요가 가라앉고, 포츠머츠 조약에 서명함에 따라 평온을 회복했다. 1906년에 들어서 의회(Duma) 선거가 치러지고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투표권은 아직 제한적이었지만, 시민단체의 조직과 정치적 결사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법적인 것이 아니었다. 전제정은 그대로였고 아직도 황제가 최고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새 의회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였다.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를 보는 관점도 매우 온건했다. 그러나 정부와의 관계는 협조가 아니라 견제로 보았다. 이는 정부와의 갈등을 불러오고, 이로 인해 곧 러시아 최초의 입법기관인 의회의 해산을 불러왔다. 수상 스톨리핀(Stolypin)이 보다 협조적이고 온건한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쿠데타를 단행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법을 개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자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했다. 스톨리핀의 강경정책으로 1907년부터 1914년(실제로는 1917년까지)까지 러시아는 평온을 되찾았다. 이 기간 중 현대화와 산업화가 회복되고 농업구조가 개선되었다. 지성과 문화는 다시 훈풍을 맞고, 여러 분야에서 창조적인 일들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문제가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었다. 무산계층과 농민들은 아직도 가난한 삶에 허덕였고, 그 생활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무산계층은 농민 출신들로, 수백 년에 걸친 그들의 관습과 전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의 반정부적 태도로 인해 이전보다 더 혁명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지식인들은 정부의 불신 대상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 니콜라스II세 가족 -

    지식인들과 협력할 수 없었던 스톨리핀이나 그 후임자들은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여 부유층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내정은 민족주의, 외교는 제국주의적 쇼비니즘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1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궤멸적인 타격을 받아 혁명이 당겨진다. 군량미 조달을 위해 농촌에 대한 식량 공급 중단과 도시의 빵 부족을 항의하는 집회가 폭동으로 확대되면서 체제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그 지지 기반이었어야 했던 단체(젬츠보)의 지지를 잃고, 무능한 관료제도와 개혁을 주저한 왕실로 인해 제국주의 왕조는 막을 내린 것이다. 이것이 1861~1917년 사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요약이다.  (C)

     Written by 

              Hung S.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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