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집

 

A Haunted House

 

          by

  Virginia Woolf

------------------

     어느 시간에 잠이 깨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손을 맞잡은 채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며, 무언가를 들어올려 열어젖힌 후 확인하곤 했다- 마치 유령 같은 한 쌍으로.

     "우린 여기다 이걸 두었었지,"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 ", 여기도!" "위층에도 있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정원에도 있고,"라고 그가 속삭였다. "조용히," 그들은 말했다. "아니면 저들을 깨우게 될 거야."

     하지만 당신이 우리를 깨운 것은 아니었다. , 당신이 아니었지. 누군가가 "그들이 그걸 찾고 있군, 커튼을 젖히고 있어"라고 말하고는 책을 한두 페이지 더 읽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그들이 이제 그걸 찾아냈어"라고 하며 페이지 여백에 연필을 대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읽는 일에 싫증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해 보니 텅 빈 집, 활짝 열린 문들, 만족스러운 듯 구르륵거리는 멧비둘기 소리와 농장에서 들려오는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내가 뭘 찾으러 여기 들어왔더라? 뭘 찾고 싶었던 거지?" 내 손은 비어 있었다. "아마, 위층에 있나?" 사과는 다락에 있었다. 그래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 정원은 여전히 고요했고 책은 잔디밭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응접실에서 찾아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들을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었다. 창유리에는 사과와 장미가 비쳤고, 유리 속의 잎사귀들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응접실 안에서 그들이 움직여도 사과는 그저 노란 빛깔의 옆면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문이 열리면 바닥에 흩어지고 벽에 걸리며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지빠귀의 그림자가 양탄자 위를 스쳐 지나갔고, 깊은 침묵의 우물로부터 멧비둘기가 보글거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길어 올렸다. "안전해, 안전해, 안전해." 집의 맥박이 나직하게 고동쳤다. "묻혀 있는 보물, 그리고 그 방은…" 맥박이 갑자기 멈췄다. , 그것이 바로 그 묻혀 있던 보물이었을까?

     잠시 후 빛이 사라졌다. 밖의 정원은 어떨까? 하지만 나무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한 줄기 햇살 때문에 어둠을 드리웠다. 표면 아래로 차갑게 스며든 너무나 가냘프고 희귀한 그 햇살은 언제나 유리창 뒤에서 타올랐다. 죽음이 유리창이었고, 죽음이 우리 사이에 있었다. 수백 년 전, 죽음은 그 여자에게 먼저 다가가, 그 집을 나서면서 모든 창문을 닫아버렸고, 방들은 어두워졌다. 그는 집을 떠나, 그녀를 떠나 북쪽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남쪽 하늘에서 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언덕 아래에 자리 잡은 집을 발견했다. "안전해, 안전해, 안전해." 집의 심장이 기쁘게 뛰었다. "보물은 네 거야.“

     바람이 길을 따라 거세게 몰아친다. 나무들은 이리저리 몸을 숙이고 휘어진다. 빗속에서 달빛이 거칠게 흩뿌려진다. 그러나 창문으로부터 비치는 등불은 곧게 뻗어 비친다. 촛불은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타오른다. 유령 같은 두 사람은 집 안을 거닐며 창문을 열고, 우리를 깨우지 않으려고 속삭이듯 그들만의 기쁨을 찾아 나선다.

     "우린 여기서 잠을 잤었지,"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수없는 입맞춤." "아침에 눈을 뜨면 -" "나무 사이로 은빛이- " "위층에서-" "정원에서-" "여름이 오면-" "겨울 눈이 오면-." 저 멀리 닫히는 문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부드럽게 울린다.

     그들이 더 가까이 다가와 문간에 멈춰 선다. 바람이 잦아들고, 빗줄기가 은빛을 내며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린다. 우리 눈은 어둠에 잠기고, 곁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고, 유령의 망토 같은 외투를 펼치는 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손으로 등불을 가린다. "이런," 그가 나직이 숨을 쉰다. "깊은 잠이 잠들었군. 입가엔 사랑을 머금은 채로."

     그들은 은빛 등불을 우리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몸을 숙여, 오랫동안 깊이 들여다본다. 한참을 그렇게 한다. 바람이 불어, 불꽃이 약간 기운다. 거친 달빛이 바닥과 벽을 가로질러, 수그린 얼굴들을 비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얼굴들, 잠든 이들을 찾아 그들의 숨겨진 기쁨을 찾으려는 얼굴들을.

     "안전해, 안전해, 안전해." 집의 심장이 자랑스럽게 고동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 그가 탄신하듯 말한다. "당신이 또 나를 찾아냈군." "여기서," 그녀가 나직이 속삭인다. "잠을 자고, 정원에서 책을 읽고, 다락방에서 사과를 굴리며 웃던 곳. 여기가 바로 우리가 보물을 남겨둔 곳이지." 그들이 몸을 숙이고, 그들이 내는 빛이 나의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안전해! 안전해! 안전해!" 집의 맥박이 거세게 요동친다. 잠에서 깨어난 내가 외친다. ", 이것이 당신들이 묻어 둔 보물인가요? 그 마음속의 빛 말입니다." (c)

    번역: 박흥서

---------------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 – 1941): 본 블로그의 "등대로" 참고. 


 아래를 누르세요. 평화로운 캘리포니아 해변을 상징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DefaultCompany.TheFlyingFireball   

또는,  DOWNLOAD NOW

 그리고 이곳에는  90편의 영미 문학 번역본과 30편의 주제별 글이 있습니다. 아래의 주소를 누른 후

"Powered by Blogger"를 누르시면 전체 글이 등장합니다.

https://www.beethovennote.com/  


Contact


    이 블로그와 관련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다음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If you have any inquiries regarding this blog, please contact us at the following:


    https://www.beethovennote.com/p/contact.html



    다음 블로그에는 90편의  문학과 37편의 주제별 글이 있습니다.

    This blog contains 90 literary pieces and 37 articles organized by topic.

    www.beethovennote.com


겨울 꿈


      Winter Dreams 


                  by

     Scott Fitzgerald
-----------------------------


    I
    어떤 캐디들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마당에 신경쇠약에 걸린 암소를 키우는 단칸방 집에 살기도 했지만, 덱스터 그린의 아버지는 블랙 베어에서 두 번째로 큰 식료품점을운영하고 있었다. 가장 큰 가게는 셰리 아일랜드의 부유층이 찾는 '더 허브'였다.  

날씨가 싸늘하고 흐린 가을 날이라던가, 미네소타의 긴 겨울이 하얀 상자 뚜껑처럼 덮일 때면, 덱스터는 골프 코스를 덮은 눈 위에서 스키를 탔다. 그럴 때면 그는 풍경을 보며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긴 겨울 동안 골프 코스는  부스스한 깃털을 한 참새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 아팠다. 여름에는 화려한 색깔들이 펄럭이던 티샷 지점에는, 이제 무릎까지 얼어붙은 황량한 벙커만 남아 있는 것도 우울했다. 언덕을 넘을 때면 차가운 바람이 고통처럼 불어왔고, 해가 나오면 형체도 경계도 없는 강렬한 눈부심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채 터벅터벅 걸어갔다.

4월이 되자 겨울은 순식간에 물러갔다. 눈은 이미 녹아내려 블랙 베어 호수로 흘러들었고, 골퍼들은 빨간색과 검은색 공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들뜬 기쁨도, 촉촉한 생동감이 감도는 과도기도 없이 추위가 사라진 것이다.

덱스터는 북쪽 지방의 봄에는 어딘가 음울한 기운이 감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가을에는 또 어딘가 아름다운 기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그는 손을 꽉 쥐고 몸을 떨며 바보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상상 속의 군중이나 병사들에게 갑작스럽고 단호한 몸짓으로 명령을 했다. 10월은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11월은 황홀한 승리감으로 고조되었으며 이러한 기분이 되면, 셰리 섬에서 보낸 여름의 짧고 찬란한 기억들은 그의 머릿속 창작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는  상상 속 페어웨이 위에서 수백 번이나 치러진 멋진 경기에서 T. A. 헤드릭 씨를 꺾어 골프 챔피언이 되었는데, 경기마다 그는 세부 규칙을 바꾸어  때로는 우스울 정도로 손쉽게 승리하기도 했고, 때로는 멋지게 역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는 모티머 존스 씨처럼 피어스-애로우 자동차에서 내려, 셰리 아일랜드 골프 클럽 라운지로 냉정한 자세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면, 감탄하는 군중에 둘러싸인 채 클럽 뗏목으로 만든 스프링보드 위에서 멋진 다이빙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입을 딱 벌린 채 경이로움에 잠겨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모티머 존스 씨도 있었다. 모두 그의 상상 속의 일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존스 씨가 -상상 속의 유령이 아니라 그 본인이 직접-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덱스터에게 다가왔다. 그는 덱스터야말로 클럽 최고의 캐디라고 치켜세우며, 만약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면 캐디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취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클럽의 다른 모든 캐디들은  홀마다 공을 하나씩 잃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니요." 덱스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캐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나이가 너무 많거든요."

"너 기껏해야 열네 살이잖아. 도대체 왜 하필 오늘 아침에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다음 주에 나랑 같이 주 대회에 가기로 약속했었잖아."

"저는 제가 너무 늙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덱스터는 'A급' 배지를 반납하고 캐디 마스터에게서 받을 돈을 챙긴 뒤, 블랙 베어 빌리지에 있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본 최고의 캐디야." 그날 오후, 모티머 존스 씨가 술잔을 기울이며 소리쳤다. "공을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어! 의욕적이고, 영리하고, 조용하고, 정직하고, 고마워할 줄도 알지!"

골프 공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던 열한 살의 소녀가 있었다. 훗날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숱한 남자들에게 끝없는 비탄을 안겨줄 운명을 타고난 어린 소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추함'을 지닌 아이였다. 하지만 그 매혹의 불씨는 이미 엿보이고 있었다. 미소를 지을 때면 입꼬리가 아래로 비스듬히 처지는 모습이나 -맙소사!- 거의 열정적이라 할 만큼 강렬한 눈빛에는 어딘가 불경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런 여인들에게는 생명력이 일찍부터 싹트는 법이다. 그 생명력은 지금 그녀의 가냘픈 몸을 뚫고 은은한 빛을 발하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 소녀가 9시에 하얀 린넨 옷을 입은 한 간호사와 함께 코스로 의기양양하게 나왔는데, 간호사는 흰 캔버스 가방에 담긴 새 골프채 다섯 자루를 들고 있었다. 덱스터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캐디 하우스 옆에 서서 다소 어색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뜬금없고 기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분명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건네는 방식으로 그 어색함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글쎄, 정말 좋은 날이네요, 힐다." 덱스터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내리며 미소를 지었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잠시 덱스터를 보았다.

그리고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음, 오늘 아침에는 사람이 별로 없나 보네요?"

또다시 환한 미소가 번졌다. 뻔하도록 인위적인 미소였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간호사는 딱히 어디를 보는지도 모른 채 말했다.

"아,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덱스터는 입을 약간 벌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면 자신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마주칠 것이고, 뒤로 물러서면 그녀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잠시 동안 그는 그녀가 얼마나 어린아이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그녀를 몇 번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블루머(헐렁한 바지) 차림이었다.

갑자기, 덱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짧고 툭 끊어지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놀란 듯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이봐!"

덱스터가 멈춰 섰다.

"얘야—"

의심할 여지 없이 덱스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그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미소를 마주해야 했는데, 적어도 십수 명의 남자들이 중년이 되어서까지  기억 속에 간직하게 될 바로 그런 미소였다.

"얘야, 골프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아니?"

"레슨 중이세요."

"그럼 캐디 마스터는 어디 계신지 아니?"

"오늘 아침에는 아직 안 오셨어요."

"아."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가며 디뎠다.

"캐디를 구하고 싶어." 간호사가 말했다. "모티머 존스 부인께서 골프를 치라고 우리를 보내 주셨는데, 캐디 없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바로 그때 존스 양의 불길한 눈길과 곧이어 번뜩이는 미소가 그녀의 말을 멈추게 했다.

"여기에는 저밖에 캐디가 없어요." 덱스터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캐디 마스터가 올 때까지 제가 여기서 책임을 맡아야 해요."

"아."

존스 양과 그녀의 수행원들은 덱스터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격렬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결국 존스 양이 클럽 하나를 집어 들고는 거칠게 땅바닥을 내리치는 것으로 그 대화는 끝이 났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더욱 확실히 하려는 듯 클럽을 다시 들어올려 간호사의 가슴을 세게 내리치려 했으나, 간호사가 그 클럽을 낚아채어 비틀어 빼앗았다.

"이 고약하고 심술궂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존스 양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다시 말다툼이 벌어졌다. 덱스터는 그 장면 속에 희극적인 요소가 담겨 있음을 깨닫고 몇 차례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그때마다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억눌렀다. 는 어린 존스 양이 간호사를 때린 것이 정당했다는, 기이할 정도의 확신을 떨쳐낼 수 없었다.

간호사가 도움을 받기 위해 찾은 캐디 마스터가 뜻밖에 나타나  상황이 해결되었다.

"존스 양은 어린 캐디가 있어야 하는데, 이 녀석은 할 수 없다고 하는군요."

"맥켄나 씨가 존스 양이 오실 때까지 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덱스터가 재빨리 대답했다.

"자, 이제 왔어요." 존스 양은 캐디에게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런 다음 골프백을 내려놓고는 거만한 걸음으로 첫 번째 티를 향해 걸어갔다.

"자, 어때?" 캐디 마스터가 덱스터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거기 바보처럼 서 있어? 가서 아가씨 골프채나 들어."

"오늘은 안 나갈 것 같아요." 덱스터가 말했다.

"설마...."

"그냥 그만둘래요."

자신이 내린 결정의 무게가 그를 두렵게 했다. 그는 인기 있는 캐디였고, 여름 동안 벌어들이는 월 30달러는 호수 주변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수입이었다. 하지만 그는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그로 인한 동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격렬하고 즉각적인 분출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도 아니었다. 훗날 흔히 그랬듯이, 덱스터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겨울 꿈'에 이끌리고 있었다.


II

물론 그  '겨울 꿈'들이 지닌 질이나 시기적 성격은 매번 달랐지만, 그 꿈의 본질만은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 훗날 덱스터는 주립 대학의 경영학 과정을 밟는 대신(당시 사업이 번창하던 아버지가 학비를 대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에 있는 더 오래되고 유명한 대학에 진학하는 길을 택했는데, 이는 불확실하나 유익한 점이 있을 것으로 믿고 따른 선택으로, 그곳에서 그는 늘 부족한 학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겨울 꿈이 처음에는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그 소년에게 단지 속물적인 면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화려한 것들이나 화려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원했던 게 아니라, 바로 그 화려한 것들 자체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종종 자신이 왜 그것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최고의 것을 갈망하곤 했으며, 때로는 삶이 으레 안겨 주는 알 수 없는 거절이나 제약에 부딪히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인생 전체가 아니라, 바로 그가 거부한 것들 중 하나에 관한 것이다.

그는 돈을 벌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블랙 베어 레이크를 찾는 많은 부자들이 사는 도시로 갔다. 그곳에 머문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스물세 살의 나이에, 벌써부터 사람들은 그를 두고 "저 청년이야말로..."라며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주변의 부잣집 아들들이 위태롭게 채권을 팔거나 불안정한 방식으로 유산을 투자하고, 혹은 '조지 워싱턴 상업 과정'이라는 방대한 교재를 힘겹게 공부하고 있을 때, 덱스터는 대학 졸업장과 자신감 넘치는 언변을 담보로 1천 달러를 빌려 세탁소의 지분을 인수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그곳은 작은 세탁소에 불과했지만, 덱스터는 고급 울 골프 양말을 줄어들지 않게 세탁하는 영국인들의 비법을 익혀, 1년도 채 되지 않아 니커보커(knickerbocker: 뉴욕의 초기 네덜란드 정착민의 후손 ) 바지를 즐겨 입는 고객 층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마치 골프공을 잘 찾아내는 캐디를 고집하듯, 자신들의 셰틀랜드(Shetland: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에 위치한 약 1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양말과 스웨터를 반드시 그의 세탁소에 맡기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객 아내들의 속옷까지 세탁하게 되었고, 도시 곳곳에 5개의 지점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스물일곱이 되기도 전에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세탁소 체인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는 사업을 매각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두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스물세 살 때, "허허, 저 녀석 참 괜찮군" 하는 말을 즐겨 하던 백발의 신사들 중 한 명인 하트 씨가 그에게 주말 동안 셰리 아일랜드 골프 클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대 카드를 선물로 주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오후 그는 하트 씨, 샌드우드 씨, 그리고 T. A. 헤드릭 씨와 함께 4인 1조로 골프를 치게 되었다. 그는 과거에 바로 이 골프장에서 하트 씨의 골프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눈을 감고도 모든 벙커와 골짜기 위치를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네 명의 캐디들을 향해 자주 눈길을 보냈다. 혹시라도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좁혀줄 만한 어떤 눈빛이나 몸짓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날은 순간적이고 익숙한 느낌이 들던, 기묘한 하루였다. 한순간 그는 자신이 마치 침입자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T. A. 헤드릭 씨에 대해 압도적인 우월감을 느끼며 그를 대단찮게 여겼다. 헤드릭 씨는 지루한 인물인 데다, 이제는 골프 실력조차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하트 씨가 15번 홀 그린 근처에서 공을 잃어버려,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러프의 억센 풀숲을 뒤지고 있을 때, 등 뒤 언덕 너머로부터 "위험해요!"라고 외치는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뒤지던 일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반짝이는 새공 하나가 언덕을 넘어 날아와 T. A. 헤드릭 씨의 복부를 강타했다.

"맙소사!" T. A. 헤드릭 씨가 소리쳤다. "저 미친 여자들을 좀 쫓아내야겠어. 정말 너무하잖아."

언덕 너머로 머리가 보이고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가 지나가도 될까요?"

"내 배를 쳤잖아!" 헤드릭 씨가 격분하여 소리쳤다.

"내가요?" 여자가 남자들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위험'이라고 소리쳤어요."

그녀는 무심코 남자들을 한 명씩 훑어본 후, 페어웨이에서 자기 공을 찾으려고 했다.

""내 공이 러프에 빠졌나?"

이 의문이 순수한 것인지 악의적인 의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파트너가 언덕 너머로 올라오자,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뭐에 맞지 않았더라면 그린에 올라갔을 텐데."

그녀가 짧은 아이언 샷을 치기 위해 자세를 잡자, 덱스터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푸른색 면제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목과 어깨를 두른 흰색 테두리가 그녀의 그을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열한 살의  나이에 열정적인 눈과 아래로 처진 입매를 하여 다소 우스꽝스러웠던 그 지나치게 말랐던 체형은 이제 아니었다. 그녀는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뺨 가운데 감도는 홍조는 마치 그림 속의 색채 같았는데, 그것은 단순히 붉게 상기된 색이 아니라 마치 금세라도 옅어져 사라질 듯 일렁이며, 열기 어린 온기를 머금은 듯한 색이었다. 이러한 홍조와 표정에 따라 변화하는 입매는 끊임없이 변하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과 열정적인 활력을 느끼게 했으며, 그 분위기는 그녀의 눈에 서린 슬픈 듯한 우아함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공을 쳤고, 공은 그린 반대편 벙커에 빠졌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무심히 건네고는 공을 쫓아갔다.

"저 주디 존스 말이야!" 헤드릭 씨가 옆 티에서 그녀가 먼저 플레이하기를 기다리며 말했다. "6개월 동안 매를 맞고 정신 차리고 난 다음,구식 기병대 대장이랑 결혼시키면 되겠군."

"맙소사, 정말 예쁘군!" 서른 살이 조금 넘은 샌드우드 씨가 말했다.

"예쁘다고?!" 헤드릭 씨가 경멸적으로 외쳤다. "쟤는 항상 키스받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여! 마을 송아지들마다 그 큰 눈으로 쳐다보잖아!"

헤드릭 씨가 모성 본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의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꽤 훌륭한 골프 실력을 보여줄 텐데 말이야." 샌드우드 씨가 말했다.

"자세가 엉망이야." 헤드릭 씨가 엄숙하게 말했다.

"몸매는 아주 좋지." 샌드우드 씨가 말했다.

"공을 더 멀리 날리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걸." 하트 씨가 덱스터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오후 늦게 해가 저물며 황금빛과 다채로운 푸른색, 진홍색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며 화려한 광경을 연출했고, 이내  여름 밤 서부 특유의 건조한 밤이 찾아왔다. 덱스터는 골프 회관 베란다에 서서, 가을  달빛 아래, 미풍 속 은빛 당밀처럼 일렁이는 호수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달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듯 고요해지자, 호수는 창백하고 정적인 맑은 웅덩이로 변했다. 덱스터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가장 멀리 떨어진 뗏목까지 헤엄쳐 나아가, 그곳 다이빙대의 젖은 캔버스 위에  몸을 뻗고 누웠다.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오르고, 별이 빛나는 가운데 호수 주변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둑한 호수의 선착장 쪽으로부터 '친친', '룩셈부르크 백작', '초콜릿 병사' 등에 나오는 여름철의 노래들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는데, 물 위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를 언제나 아름답게 느꼈던 덱스터는 숨을 죽인 채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순간 들려온 피아노 선율은 덱스터가 대학 2학년이던 5년 전만 해도 경쾌하고 새로운 곡이었다. 그가 무도회에 참석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던 그때, 어느 무도회에서 그 곡이 연주되었을 때 그는 체육관 밖에 서서 그 소리를 듣곤 했었다. 그 선율은 그에게 일종의 황홀경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바로 그 황홀경 속에서 지금 자신에게 펼쳐지는 상황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바로 삶을 깊이 음미하는 기분, 즉 자신이 삶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를 찬란함과 매혹을 발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때,섬의 어둠 속으로부터 납짝하고 희끄무레한 직사각형 물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더니, 질주하는 모터보트의 굉음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보트 뒤편으로는 물살이 갈라지며 두 갈래의 하얀 띠가 길게 펼쳐졌고, 보트는 순식간에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보라 소리로 피아노의 경쾌한 선율을 집어삼켜 버렸다. 팔로 몸을 일으킨 덱스터는 조타석에 서 있는 한 형체와, 점점 멀어지는 수면 너머로 자신을 응시하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곧 보트는  호수 한가운데에서 거대하고도 목적 없는 물보라의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그 원 중 하나가 궤도를 바꾸어 뗏목을 향해 다시 다가왔다.

"저 사람 누구야?" 그녀는 엔진을 끄며 소리쳤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덱스터는 그녀의 수영복 차림을 볼 수 있었다. 분홍색 점프수트 두 벌로 이루어진 수영복이었다.

보트의 앞부분이 뗏목에 부딪히자 뗏목이 비스듬히 기울어졌고, 덱스터는 그녀 쪽으로 쏠렸다. 서로 다른 정도의 흥미를 느끼며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오늘 오후에 우리랑 같이 놀았던 남자들 중 한 명 아니야?" 그녀가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저기, 모터보트 운전할 줄 아세요? 할 줄 아신다면 이걸 좀 몰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뒤에서 서핑 보드를 탈 수 있거든요. 제 이름은 주디 존스예요."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입매를 아무리 비틀어도 기괴해지는 게 아니라  아름다울 뿐이었으니까. "저는 저기 섬에 있는 집에 사는데, 그 집에 저를 기다리는 남자가 한 명 있거든요. 그 사람이 차를 몰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저는 부두에서 보트를 몰고 나왔어요.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형이 바로 저라면서 저를 찾아왔거든요."

물고기가 튀어오르고 별이 빛나는 가운데, 호수 주변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덱스터는 주디 존스 곁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보트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내 그녀는 물속으로 들어가 유연한 크롤 영법으로 물 위에 떠 있는 서핑 보드를 향해 헤엄쳐 갔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날아가는 갈매기를 바라볼 때처럼,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눈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그녀의 팔은 은은한 백금빛 잔물결 사이를 유연하게 움직였다. 팔꿈치가 먼저 솟아오른 다음, 마치 떨어지는 물줄기 같은 리듬으로 아래 팔을 뒤로 넘겼고, 이어서 앞을 향해 팔을 뻗어 내리며 물살을 갈랐다.

그들은 호수로 나아갔다. 덱스터가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이제 위로 기울어진 서핑 보드의 낮은 뒷부분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 빨리," 그녀가 외쳤다. "최대한 빨리."

그는 그녀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레버를 앞으로 밀었고, 하얀 물보라가 뱃머리로 솟구쳤다. 그가 다시 돌아보니 소녀는 빠르게 나아가는 보드 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추워!" 그녀가 소리쳤다. "이름이 뭐예요?"
      그는 이름을 말했다.
      "그럼 내일 저녁 식사에 같이 하실래요?"

     그의 심장은 마치 배의 날개처럼 쿵쾅거렸고, 그녀의 무심한 제안은 이 번에도 그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III

그 다음 날 저녁,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덱스터는 아늑하고 넓은 여름 용 거실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밝은 방을 이미 주디 존스를 사랑했던 남자들로 가득 채워 보았다. 그는 그들이 어떤 부류의 남자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명문 사립학교 출신으로 세련된 옷차림과 건강한 여름을 보내며 그을린 피부를 뽐내던 바로 그런 남자들이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더 새롭고 강인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장차 자기 아들들이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결국 자신은 그들이 끊임없이 태어나는 거칠고 강인한 원재료나 마찬가지임을 알았다.

그는 번듯한 옷을 차려 입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자, 미국 최고의 양복점들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오늘 저녁  입고 있는 양복을 지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대학과는 다른, 자신이 다닌 대학 특유의 절제된 태도를 몸에 익혔다. 그는 그런 태도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잘 알았다. 그는 옷차림이나 몸가짐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이를 대충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자신감은 그의 자식들에게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 성은 '크림슬리치'였다. 그녀는 보헤미아 출신의 농민 계급이었고, 평생 서툰 영어로 말을 했다. 따라서 그녀의 아들은 격식을 차려야만 했다.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주디 존스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푸른색 실크 소재의 저녁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좀 더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 처음에는 실망했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그녀가 배선실 문을 열고 "마사, 저녁 식사 내와도 돼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런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당연히 집사가 저녁 식사를 알리고, 칵테일도 곁들여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게 되자, 그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 계실 거예요." 그녀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를 떠올렸고, 오늘 밤 그녀의 부모님이 이곳에 오지 않은 사실에 안도했다. 왔다면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미네소타의  키블 마을에서 태어났기에, 늘 블랙 베어 빌리지 대신 키블을 고향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곳 시골 마을들은 근사한 호수들의 발판 노릇을 하지 않고, 보기에 불편하지만 않다면 고향으로 삼기에 꽤 괜찮은 곳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그녀가 자주 찾았던 그의 대학에 대해, 그리고 셰리 아일랜드에 손님들을 보내주던 인근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덱스터는 바로 그 도시로 돌아가 번창하는 세탁소 일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었다.

저녁 식사 도중 그녀는 우울해했고, 따라서 덱스터는 불안감을 느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뱉는 그녀의 심술 섞인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는 걱정스러웠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미소를 짓든 -그를 향해서든, 닭 간 요리를 향해서든, 아니면 허공을 향해서든- 그 미소에 진정한 즐거움이나 유쾌함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선홍빛 입꼬리가 아래로 처질 때면,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입맞춤을 청하는 몸짓에 가까웠다.

저녁 식사 후, 그녀는 그를 어두컴컴한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 분위기를 바꾸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조금 울어도 괜찮을까요?" 

"제가 당신을 지루하게 하는 것 같네요."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예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하지만 오늘 오후에 정말 끔찍한 일을 겪었어요. 제가 아끼던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 오후에 갑자기 자기가 아주 가난하다고 말하더군요. 전에는 그런 뉘앙스조차 풍긴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너무 시시하게 들리나요?"

"어쩌면 그는 당신에게 말하기가 두려웠을지도 모르지요."

"그랬다고 해도," 그녀가 대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엉뚱한 태도를 보였죠. 있잖아요, 제가 그를 가난하다고 생각했다면… 사실 전 가난한 남자들에게 푹 빠져서 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제 관심도 그 충격을 견뎌낼 만큼 강하지 않았어요. 그의 말은 마치 여자가 약혼자에게 자기가 과부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과 같죠. 그가 과부를 싫어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제대로 시작해 볼까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죠?"

덱스터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말했다. "제 커리어는 대부분 미래에 달려 있죠."

"가난하신가요?"

"아니요."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 북서부 지역에서 제 나이 또래 남자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을 겁니다.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옳게 시작하라고 조언해 주셨잖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살짝 내려가더니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몸짓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덱스터의 목구멍에 무언가 덩어리가 솟구쳤고, 그는 숨을 죽이며 그들의 입술이 만들어낼 예측할 수 없는 조합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약속이 아닌 성취와 같은 키스로 자신의 흥분을 아낌없이, 깊이 전했다. 그 키스는 그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허기가 아닌,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갈망이었다... 마치 자선과 같아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갈망을 만들어내는 키스였다.

      그가 주디 존스를 원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자부심이 강하고 열망에 가득 찬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품어온 마음이었다.

     IV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 기조는 강약을 달리하며 계속 이어졌다. 덱스터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솔직하고 거침없으며 도덕적 원칙에 구속을 받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준 것이다. 주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의 매력을 총동원해 그것을 쟁취하려 했다. 그녀의 방식에는 우회적인 수단이나 주도권 다툼, 혹은 결과에 대한 치밀한 계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의 모든 관계에는 지적인 요소가 거의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저 남자들이 자신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강렬하게 의식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덱스터는 그녀를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결점들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 정당화해 주는 열정적인 에너지와 하나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주디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어젯밤엔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밤엔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고 속삭였을 때, 그는 그 말이 참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그가 잠시나마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었던, 그녀 특유의 그 절묘하고도 격정적인 감정의 동요였다. 하지만 일주일 뒤, 그는 똑같은 그녀의 성향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차에 그를 태우고 피크닉 저녁 식사를 하러 갔으나, 식사가 끝나자마자 역시 자신의 차를 몰고 다른 남자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덱스터는 몹시 화가 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가 그 다른 남자와 키스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굳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여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대여섯 명 남짓한 남자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들 각자는 한때 다른 누구보다 그녀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적이 있었으며, 그중 절반가량은 가끔씩 되살아나는 감상적인 추억에 여전히 위안을 얻으며 지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무시를 당하고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일 때면, 그녀는 그에게 달콤하고 짧은 한때를 선사하곤 했고, 그 덕분에 그 사람은 1년쯤 더 그녀의 뒤를 따르곤 했다. 주디가 무력하고 패배감에 젖은 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간 것은 결코 악의 때문이 아니라, 사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짓궂은 구석이 있다는 것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 새로운 남자가 마을에 나타나면, 그때까지의 남자들은 모두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데이트 약속도 자동으로 취소되었다.

무엇을 해 보려 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모든 것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물리적인 공세로 '쟁취'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기교나 매력 같은 수단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는데, 만약 누군가 그런 것들로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녀는 즉시 상황을 육체적인 차원으로 돌려놓곤 했다. 그러면 그녀가 지닌 압도적인 육체적 매력의 마법 아래, 강인한 남자든 지적인 남자든 모두가 자신의 방식이 아닌 그녀가 짜 놓은 판에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매력을 발휘하는 데서만 즐거움을 찾았다. 어쩌면 수많은 젊은 사랑, 젊은 연인들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채우는 법을 익혔을 수도 있었다.

덱스터의 첫 번째 희열은 곧 불안과 불만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드는 무력한 황홀경은 활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아편과 같았다. 다행히 겨울 동안 그가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황홀한 순간들이 드물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이를테면 그 첫해 8월에는 두 사람 사이에 깊고도 자연스러운 이끌림이 있는 듯했다. 어스름한 베란다에서 보낸 긴 저녁 시간들, 늦은 오후의 희미한 빛 속에서, 그늘진 구석이나 정원 정자의 격자 울타리가 가려주는 곳에서 나누었던 묘하고도 아련한 입맞춤들, 그리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 아래 그를 마주할 때면 꿈결처럼 싱그럽고도 수줍어하던 그녀의 모습이 함께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럴 때면 약혼이라는 황홀경에 휩싸였지만, 정작 약혼이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황홀경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왔다. 그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청혼을 한 것도 바로 그 사흘 동안의 일이었다. 그녀는 "언젠가는요"라고도 했고, "키스해 줘요"라고도 했으며,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도, "사랑해요"라고도 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 상황에는 약혼의 모든 황홀경에 휩싸였지만, 정작 약혼이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는 순간 그 황홀경은 더욱 날카로웠다.

그 3일간의 평온은 9월 중순 그녀의 집을 찾아온 뉴욕 출신 남자의 등장으로 깨지고 말았다. 덱스터를 괴롭힌 것은 그 남자와 주디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었다. 그는 거대 신탁회사의 사장 아들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날 무렵, 주디가 지루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날 밤 댄스 파티에서 그녀는 동네 남자와 함께 모터보트에 앉아 내내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이 뉴욕에서 온 남자는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클럽 안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동네 남자에게 방문객이 지루해졌다고 말했고, 이틀 뒤 그 남자는 떠났다. 역에서 그와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이 목격되었는데, 당시 그 남자는 몹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지나갔다. 스물네 살이 된 덱스터는 점차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시내의 클럽 두 곳에 가입했고, 그중 한 곳에서 지냈다. 비록 그 클럽들의 사교 파티에서 파트너 없는 남자들이 모여 있는 무리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주디 존스가 나타날 법한 댄스 파티에는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는 마음껏 사교계에 나갈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결혼 적령기의 젊은 남자였고, 시내 어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주디 존스에 대한 그의 고백은 그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하지만 그는 사교계에서 출세하려는 야망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목요일이나 토요일 파티에 으레 불려 다니고, 젊은 기혼자들의 저녁 모임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끼어드는 '춤추는 남자들'을 경멸했다. 그는 이미 동부의 뉴욕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디 존스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그녀가 자라온 세상의 실체를 깨닫고 환상이 깨졌을지는 몰라도, 그녀가 지닌 매력에 대한 그의 환상만큼은 바뀔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직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만 그가 그녀를 위해 한 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디 존스를 처음 만난 지 18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는 다른 여성과 약혼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린 쉬러였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덱스터의 잠재력을 신뢰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아이린은 금발에 성품이 다정하고 올곧았으며 체격은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구혼자가 있었지만, 덱스터가 정식으로 청혼하자 그녀는 기꺼이 그들을 정리했다.

여름, 가을, 겨울, 봄,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여름과 가을, 그는 자신의 혈기 왕성한 시절을 주디 존스의 종잡을 수 없는 입술에 바치다시피 했다. 그녀는 그를 대할 때, 때로는 흥미를,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악의를, 때로는 무관심을, 그리고 때로는 경멸의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마치 그를 한때나마 마음에 두었던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그런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사소한 무시와 모욕을 그에게 퍼부었다. 그녀가 그를 불렀다가 하품을 하고는 다시 부르면, 그는 종종 씁쓸한 기색과 함께 눈을 가늘게 떠 반응했다. 그녀는 그에게 황홀한 행복과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과 적지 않은 골칫거리를 안겨주었으며, 그를 모욕하고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단지 재미 삼아, 일을 향한 열정을 잊은 채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저울질하며 흔들어댔다. 그녀는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단 한 가지, 그를 비판하는 일만은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그를 향해 그녀가 드러냈던 그 철저한 무관심을 혹여나 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가을이 지나자, 그는 주디 존스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야만 했고, 마침내 스스로를 설득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안겨준 고통과 괴로움을 되새겼으며, 아내로서 가정을 하고, 그녀가 지닌 명백한 결점들을 하나하나 꼽아 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후 잠이 들었다. 그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나 점심 식사 때 마주 보던 그녀의 눈빛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일주일 내내 늦게까지 열심히 일했고, 밤이면 사무실로 가 앞으로의 세월을 설계했다.

어느 주말, 그는 댄스 파티에 갔다가 그녀와 춤을 추던 다른 남자 대신 끼어들어, 그녀와 잠시 춤을 추었다. 만난 이후 거의 처음으로, 그는 그녀에게 함께 앉아 쉬자고 청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아름답다는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를 아프게 한 건 그녀가 그런 말들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그날 밤 그녀 곁에 새로운 남자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질투라는 감정이 무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댄스 파티에 늦게까지 머물렀다. 아이린 쉬러와 함께 앉아 한 시간 동안 책과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는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쓸 수 있게 된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둔 덱스터 그린이라면 마땅히 그런 것들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는, 다소 고지식하고 잘난 체하는 듯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 일은 그가 스물다섯 살이던 10월에 있었다. 이듬해 1월, 덱스터와 아이린은 약혼했다. 약혼 사실은 6월에 발표될 예정이었고, 두 사람은 그로부터 석 달 뒤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네소타의 겨울은 끝없이 길었고, 마침내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며 눈이 녹아 블랙 베어 호수로 흘러들기 시작한 것은 5월이 다 되어서였다. 덱스터는 1년여 만에 처음으로 마음의 평온을 누리고 있었다. 주디 존스는 플로리다에 머물다가 핫스프링스로 갔는데, 그 어딘가에서 약혼을 했다가 또 어딘가에서 파혼을 했다. 덱스터가 그녀를 완전히 단념했을 무렵, 사람들이 여전히 두 사람을 연관지어 생각하며 그녀의 소식을 묻는 것이 그를 슬프게 했다. 하지만 아이린 쉬러의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주디 존스의 안부를 묻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이제 그는 그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다.

드디어 5월이 되었다. 덱스터는 비에 젖은 듯 축축한 어둠이 깔린 밤거리를 거닐며,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별달리 이룬 것도 없이, 그토록 컸던 황홀경이 어째서 자신으로부터 그토록 빨리 사라져 버렸는지 의아해 했다. 지난 5월은 주디가 일으킨 가슴 저미는 소란, 용서할 수 없으면서도 결국 용서했던 소란으로 기억되는 시기였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었다고 착각하곤 했었다. 그는 그 한 줌의 옛 행복을 대가로 치르고, 이제 풍성한 만족감을 얻은 셈이었다. 그는 아이린이 자신의 등 뒤에 드리워진 커튼, 반짝이는 찻잔들 사이로 움직이는 손길, 아이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불과할 것이리라는 것을 알았다. 불꽃과도 같던 아름다움, 밤의 마법,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과 계절의 경이로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래로 살짝 처진 가느다란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아 그를 눈동자의 천국으로 들어올리던 그 순간도…, 그것은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강인하고 생명력이 넘쳤기에, 그러한 기억들이 쉽게 사라져 버릴 수는 없었다.

한여름으로 가는 좁은 다리 위 며칠간 날씨가 좋았던 5월 중순 어느 날 밤, 덱스터는 아이린의 집을 찾았다. 일주일 뒤면 두 사람의 약혼이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그 소식에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유니버시티 클럽'의 라운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 시간 동안 춤추는 사람들을 지켜볼 참이었다. 그녀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어떤 든든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는 확고한 인기를 누리는, 그야말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갈색 벽돌집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린!" 그가 불렀다.

쉬러 부인이 거실에서 나와 그를 맞이했다.

"덱스터," 그녀가 말했다. 

"아이린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위층으로 올라갔어요. 자네와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내가 가서 자라고 했지."

"괜찮아요, 저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내일 아침에 자네랑 골프 치기로 했거든. 오늘 밤 아이린에게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지, 덱스터?"

그녀의 미소는 따뜻했다. 그녀와 덱스터는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거실에서 그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왔다.

묵고 있던 유니버시티 클럽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문가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문설주에 기대어 한두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품을 했다.

"안녕, 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옆에서 들려와 깜짝 놀랐다. 주디 존스가 한 남자를 뒤로하고 방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왔다. 마치 금박 천으로 덮인 가냘픈 에나멜 인형 같은 주디 존스였다. 머리에는 금색 띠가 둘러져 있었고, 드레스 자락에는 금색 슬리퍼 장식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미소를 지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섬세한 빛이 활짝 피어나는 듯했다. 따뜻하고 은은한 바람이 방 안으로 불어왔다. 그는 턱시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경련하듯 꽉 쥐었다. 갑자기 흥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 

"이리 와요,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녀가 돌아서자 그도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그녀의 귀환에 감격하여 그는 눈물이 날 뻔했다. 그녀는 매혹적인 거리들을 지나며, 도발적인 음악 같은 일들을 해냈다. 모든 신비로운 일들, 새롭고 설레는 희망들이 그녀와 함께 사라졌다가 이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문간에서 돌아서며 물었다.

"여기, 차 있어요? 없으면 내 차가 있어요."

"쿠페 있어요."

그때, 황금빛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차에 올라탔었다-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고, 팔꿈치를 문에 얹은 채-그렇게 기다리면서. 자신을 더럽힐 만한 무언가가-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있었다면 진작에 더러워졌을 테지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녀의 내면이 쏟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애써 몸을 움직여 시동을 걸고 차를 후진시켜 거리로 나섰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했다. 그녀가 이런 짓을 벌인 건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고, 그때마다 그는 마치 장부에서 골치 아픈 거래 내역을 지워버리듯, 그녀를 자신의 삶에서 떨쳐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시내로 차를 몰고 가며, 마치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태도로 텅 빈 상가 거리를 지나갔다. 간간이 영화관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가 보이거나, 폐병을 앓는 듯한 혹은 싸움꾼 기질이 다분한 청년들이 당구장 앞에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투명한 유리창과 탁한 노란 불빛으로 감싸인 술집 안에서는,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손바닥으로 바를 내리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 위기 상황에서 그는 어색함을 깨뜨릴 만한 가벼운 말이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 그는 유니버시티 클럽 쪽으로 지그재그로 차를 몰았다.

"나를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모두들 당신을 그리워했어."

그는 그녀가 이레네 쉬러를 아는지 궁금했다. 주디는 겨우 하루 전에 돌아왔는데,  그의 약혼과 거의 동시에 그를 떠났던 것이다.

"정말 멋진 말이네!" 주디는 슬픈 듯 웃었지만,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대시보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예전보다 더 잘생겼네. 덱스터, 당신의 눈은 정말 잊을 수 없어요."

그는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2학년생에게나 할 법한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녀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그녀는 사실상 그런 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으며,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가 그저 어린애 같은 경솔한 짓을, 아마도 과시하려는 의도로 저질렀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용서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결코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은 나 말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겠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날 사랑하는 방식이 좋아요. 오, 덱스터, 작년 일은 잊었어요?"

"아니, 잊지 않았어."

"나도!"

그녀는 진심으로 감동을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연기에 휘둘린 걸까?

"우리가 다시 그때처럼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녀가 말하자, 그는 억지로 대답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겠지... 아이린 쉬러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쉬러'라는이름을 강조한 건 아니었지만, 덱스터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 집에 데려다 줘요." 주디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 애들이랑 다시는 그 바보 같은 춤을 추고 싶지 않아."

그들이 주택가로 이어지는 거리로 접어들자, 주디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둠이 걷히고, 부잣집 저택들이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모티머 존스 부부의 집, 습기를 머금은 달빛의 찬란함에 흠뻑 젖어 호화로우면서도 고요히 잠든 듯한 거대한 백색 저택 앞에 자신의 쿠페를 세웠다. 그 집의 견고함에 그는 놀랐다.  튼튼한 벽과 강철 대들보, 그 웅장한 규모와 위용은 오직 곁에 있는 젊은 미녀와의 대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있는 듯했다. 그 우람함에 비하면 그녀의 육체는 더욱 가냘퍼 보였는데,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움직이면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길까 두려웠다. 그녀의 젖은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윗입술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난 누구보다 아름다운데,"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왜 행복할 수 없을까?" 그녀의 촉촉한 눈빛이 그의 평정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입술은 애처로운 슬픔으로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덱스터, 당신이 날 받아준다면 결혼하고 싶어요. 당신은 내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정말 아름다워질 거예요, 덱스터."

    분노, 자존심, 열정, 증오, 애정 등 수많은 감정이 그의 입술 위에서 뒤엉켰다. 그때 완벽한 감정의 물결이 그를 휩쓸었고, 그 속에는 지혜, 관습, 의심, 명예의 조각들이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바로 그의 여자, 그의 것, 그의 아름다운 것, 그의 자랑이었다.
    "돌아오지 않겠어요?" 그녀가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알았어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올게."

     V
     그날 밤 즉시, 그리고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날 밤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돌이켜보면, 주디가 그에게 보였던 열정적인 감정이 고작 한 달밖에 지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뜻을 굽힘으로써 결국 더 깊은 고뇌를 겪게 된 일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아이린 쉬러와 그녀의 부모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린의 슬픔으로 인해 그의 뇌리에 남아 있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도 없었다.

덱스터는 본질적으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는 그가 그 도시를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 자체가 피상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세간의 평판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또한 주디 존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움직이거나 그녀를 붙잡아 둘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그녀에게 아무런 악감정을 품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너무 늙어 사랑할 수 없는 그날까지 그녀를 사랑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잠시나마 깊은 행복을 맛보았던 것처럼, 오직 강한 자만이 겪을 수 있는 깊은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주디가 약혼을 파기한 이유, 즉 이레네에게서 그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는 완전히 거짓된 주장조차도 -주디가 그를 배반한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이미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는 세탁소들을 모두 처분하고 뉴욕에 정착할 생각으로 2월에 동부로 향했으나, 3월에 미국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계획을 바꿔야 했다. 그는 서부로 돌아와 동업자에게 사업 운영을 맡긴 뒤, 4월 말 제1차 장교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어느 정도 안도감 속에서 전쟁을 맞이했던 수천 명의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VI

물론 이 이야기는 그의 전기傳記가 아니다.  비록 그가 젊은 시절 품었던 꿈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지만,  이제 그 꿈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끝나 가고 있다. 이제 하나의 일화만 남아 있는데, 바로 그때부터 7년 후의 일이다.

그 사건은 그가 큰 성공을 거두어 그 어떤 장애물도 거침없이 극복했던 곳, 바로 뉴욕에서의 일이다. 당시 그는 서른두 살이었는데, 전쟁 직후 잠시 다녀온 짧은 여행을 제외하면 지난 7년 동안 서부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트로이트 출신의 데블린이라는 남자가 업무차 그의 사무실을 찾아왔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건이 발생하여, 그의 인생에서 한 시기를 사실상 매듭짓게 되었다.

"그럼 중서부 출신이시군요." 데블린이라는 남자가 호기심을 담아 말했다. "재미있네요. 당신 같은 분들은 으레 월스트리트에서 나고 자랐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디트로이트에 있는 제 절친한 친구의 아내도 당신 고향 출신입니다. 그 친구 결혼식 때 제가 안내를 맡았었죠."

덱스터는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주디 심스." 데블린이 지나치듯 말했다. "한때는 주디 존스였지.".

"아, 나도 그녀를 압니다." 조바심이 그를 덥쳤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 이상의 소식은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멋진 여성이지요, " 데블린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왠지 안쓰럽네."

"왜요?" 덱스터는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아, 루드 심스는 완전히 망했지요. 아내를 학대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술이 취해 싸돌아다니고요…"

"아내도 돌아다니지 않아요?"

"아니요. 아이들과 집에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 친구에겐 그녀가 좀 나이가 많아." 데블린이 말했다.

"나이가 많다고?" 덱스터가 소리쳤다. "이봐요, 그녀는 겨우 스물일곱 살이야."

그는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 디트로이트행 기차를 타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돌연 몸을 일으켰다.

"바쁜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데블린이 급히 사과했다. "몰랐습니다--"

"아니, 안 바빠요." 덱스터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혀 바쁘지 않아요. 전혀. 그녀가… 스물일곱 살이라고 했죠? 아니, 내가 그랬지."

"네, 당신이 스물일곱 살이라고 말했습니다." 데블린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럼, 계속해 봐요."

"무슨 말씀이세요?"

"주디 존스에 관해서 말이오."

 데블린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글쎄요, 뭐...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씀드렸어요. 그는 그녀를 정말이지 악마 대하듯 하죠. 아, 그렇다고 이혼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고요. 그가 유난히 심하게 굴 때면 그녀는 그를 용서하곤 하니까요. 사실 전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디트로이트에 처음 왔을 땐 꽤 예쁜 아가씨였거든요."

예쁜 아가씨라! 그 말은 덱스터에게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쁜 여자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데블린이 대답했다.

"아, 그 여자는  괜찮습니다."

"이봐요," 덱스터가 갑자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까는 '예쁜 아가씨'라고 하더니, 이제 와선 '괜찮은 여자'라고 하니, 이해할 수 없오. 주디 존스는 그저 '예쁜 아가씨'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지. 아니, 내가 알잖아, 내가 잘 안다고. 그녀는……"

데블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싸움을 걸려는 건 아니고요." 그가 말했다. "주디는 훌륭한 아가씨이고 저도 그녀를 좋아합니다. 러드 심스 같은 남자가 어떻게 그녀에게 그토록 깊이 빠질 수 있었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그랬으니까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대부분의 여자들도 그녀를 좋아하죠."

덱스터는 데블린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 남자의 그 같은 말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 의 무신경이나 혹은 개인적인 악의 같은 것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마구잡이 추측을 했다.

"많은 여자들이 그처럼 순식간에 시들어 버리지." 데블린이 손가락을 튕겼다. "당신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결혼식 때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는 아마 내가 잊은 것도 같고요. 그 후로 워낙 자주 봐 왔으니까요. 눈매가 참 고운 여자죠."

덱스터는 어떤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난생 처음으로 그는 아주 흠뻑 취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블린이 한 말에 자신이 크게 웃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작 그 말이 무엇인지, 왜 웃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데블린이 떠나자 그는 라운지에 누워, 은은하고 아름다운 분홍빛과 금빛 색조를 띠며 저물어가고 있는 창 밖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니, 이제 자신은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주디 존스와 결혼했다가, 눈앞에서 서서히 시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자신이 방금 또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은 사라져 버렸다. 무언가가 그에게서 앗아간 것이다. 그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며, 셰리 섬의 물결이 일렁이던 모습과 달빛 비치는 베란다, 골프장의 엷은 사각형 체크무늬, 메마른 햇살,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난 부드러운 금빛 솜털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의 입맞춤에 젖어 있던 그녀의 입술, 우수 어린 애잔함을 머금은 눈빛, 그리고 아침 햇살 속의 고운 새 린넨처럼 싱그러웠던 그녀의 모습. 아니,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한때는 존재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제 그 눈물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눈물에 젖은 입과 눈, 그리고 움직이는 손 따위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을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먼 길을 떠나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은 닫혔고 해는 저물었으며, 그곳에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강철의 회색빛 아름다움 외에는 아무런 아름다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이겨냈던 슬픔조차도, 자신의 '겨울 꿈'이 찬란하게 피어났던 환상과 청춘, 그리고 삶의 풍요로움이 깃든 그 땅에 이제는 남겨두고 온 뒤였다.

"오래전," 그가 말했다. "오래전, 내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지, 그러나 이제 그건 사라져 버렸어. 이제 그건 사라졌다는 말이야, 그건 사라져 버렸다고. 난 울 수도 없어.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어. 그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C)


번역: 박흥서

------------

핏체랄드(Scott Fitzgerald, 1896-1940):

재즈 시대의 화려함과 방탕을 묘사한 소설들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 단편 소설가. '재즈 시대'라는 말은 그의 단편소설집  'Tales of the Jazz Age'를 통해 널리 알린 용어임. 그의 작품으로는 네 편의 장편 소설과 네 권의 단편 소설집, 그리고 164편의 단편 소설이 있음. 1920년대에 일시적인 성공과 부를 누렸으나, 사후에야 비로소 평단의 인정을 받음. 오늘날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미국 작가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음. 주요 작품으로는 This Side of Paradise(1920), The Great Gatsby(1925), Tender is the Night(1934) 등이 있음.

✍️ Translator’s Note (역자의 말)

"피츠제럴드 특유의 서정적이고 화려한 문체를 한국어로 감각적으로 옮기는 데 주력했습니다. 덱스터가 주디 존스를 향해 품는 열망과 그 뒤에 남는 쓸쓸한 여운을 살리기 위해, 어휘 선택에 유려함과 아련함을 더했습니다. 청춘의 화려함과 세월이 지나며 스러져가는 꿈의 허무함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도록 톤을 매끄럽게 조율했습니다."

📚 Brief Literary Commentary (작품 해설)

"『겨울의 꿈』은 피츠제럴드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의 상징적 모태가 된 단편 소설입니다. 주인공 덱스터의 야망과 주디 존스를 향한 낭만적 열망을 통해, 작가는 '위대한 미국적 꿈'의 환상과 그 뒤에 숨겨진 실체적 허무를 정교하게 그려냅니다. 환상적인 청춘의 순간들이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비극을 감각적인 묘사로 풀어낸 명작입니다."

  아래를 누르세요. 평화로운 캘리포니아 해변을 상징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DefaultCompany.TheFlyingFireball   

또는,  DOWNLOAD NOW

 그리고 이곳에는  90편의 영미 문학 번역본과 30편의 주제별 글이 있습니다. 아래의 주소를 누른 후

"Powered by Blogger"를 누르시면 전체 글이 등장합니다.

https://www.beethovennote.com/  

바로크 음악

      Baroque Music        서양 음악의 역사는 바로 기독교 찬송가의 역사이고, 따라서 서양 음악은 교회 음악의 발전과 동일선상에 있다 . 많은 음악가들이 교회 음악 발전에 헌신함에 따라 서양 음악이 발전해 온 것이다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