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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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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mbitious Visitor                            by            Nathaniel Hawthorne   - 삶의 불예측성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 --------------------      9월 어느 날 밤, 한 가족이 난로 가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계곡 물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과 마른 솔방울,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나뭇가지들로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난로의 불길이 치솟고, 타오르는 불꽃으로 인해 방안이 환했다. 부모님의 얼굴에는 잔잔한 기쁨이 흐르고, 아이들이 웃음소리, 열일곱 살 큰 딸은 행복의 여신 같은 모습이었으며 가장 따듯한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늙은 할머니의 모습 역시 긴 세월을 살아온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지역은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추운 곳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마음이 평온해 지는 묘약”의 장소였다. 그 집은 화이트 힐스의 협곡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곳은 일 년 내내 강풍이 불었고 무자비한 추위가 닥치는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가 제일 먼저 그 오두막집을 덮친 다음 사코의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그들의 머리 위로 가파른 산이 치솟아 집 옆으로 바위들이 자주 굴러 내려, 한 밤중에 그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처럼 그들은 춥고 위험한 곳에서 살았다.      큰 딸이 방금 우스갯소리를 하여 가족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을 때, 산골짜기를 불어 온 바람이 그 오두막집에서 잠시 멈춰 울음을 울 듯 슬픈 소리를 내며 문을 흔들어 놓은 다음 계곡을 지나갔다. 바람이 특별한 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잠시 마음이 슬펐다. 그러나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 때 어느 ...

프랑스 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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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ench Revolution(1789)   1. 프랑스 대혁명(개요)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은 루이15세와 루이16세의 구체제( Ancien régime )  개혁 시도가 오히려 혁명을 초래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루이14세, 루이15세 또는 루이16세 아니면 이 세 사람 모두 혁명 발발의 책임자라고 말한다. 루이14세 (1643-1715)에 의해 약화되긴 했지만 귀족들은 아직도 왕권에 도전할만한 강력한 세력이었고, 루이15세(1715-74)와 루이16세(1774-92)는 그 누구도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특권하에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했고 가톨릭 승려는 병원, 학교, 고아원의 운영자들이었다. 출생, 사망, 결혼에 따른 신고는 가톨릭 교회에 해야 했고, 교회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거나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생아로 취급되어 법적인 권리가 없었다. 이 같은 교회와 귀족세력의 발호는 사회적 긴장을 불러왔고 또 왕으로 하여금 개혁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루이14세가 양위를 할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등 일련의 전쟁으로 인한 전비 때문에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었다.      또 루이15세나 16세의 치세 기간 중 프랑스는 수많은 군사적 외교적 패배를 했고, 이로 인해 왕권의 버팀목인 군대의 충성심과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치세 초기 루이15세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치세 말에는 뽕빠두르 (Madame de Pompadour), 뒤 배리(Madame du Barry)등 귀부인들이 개인적인 취미로 정사에 관여함으로써 “여자들의 노리개”라는 말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루이 15세의 손...

카스트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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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strato     -고자 가수-        “카스트라토”는 음악사에서 불멸의 자취를 남긴 가수들이다. 이들은 소프라노(때로는 콘트랄토)목소리를 냈던 남자 가수들로, 타고났거나 아니면 외과적인 수술로 고환을 제거함으로써 어른의 폐활량에 어린이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오페라는 일종의 연극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있고 따라서 남녀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여성이 오페라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바로크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나 바로크 초기에는 여성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천박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따라서 여성을 대역할 남자 즉, 여성의 음역을 갖춘 남자 가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카스트라토”는 사춘기가 되기 전 거세를 했다. 따라서 성년이 되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아 고음의 투명한 어린이 목소리 즉 여자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이들은 처음 여성들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고 로마교황청도 이들을 고용하여 성가를 부르게 했다. 그 후 오페라가 등장하면서 극중 여성 인물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카스트라토”는 18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들의 화려하고 빛나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청중들은 “작은 고추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성악 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긴 “카스트라토”들은 다음과 같다.       -Senesino(1680-1759): 본명 '프란시스코 베르나디'. '세네시노'는 그의 고향이름을 딴 것이다. 콘트랄토 또는 메조소프라노로 노래를 불렀으며, 헨델이 특별이 좋아한 가수...

연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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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Orator              by    Anton Chekhov ----------------------     어느 청명한 아침, 악처와 술중독이라는 우리나라 전국에 유행하는 두 가지 역병으로 사망한, 학교 서기 키릴 이바노비치 바빌로노프 씨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행렬이 교회를 떠나 묘지로 향하던 중, 망자의 친구인 포플라프스키가 젊어서부터 이름을 날리는 친구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자포이킨을 만나려고 마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달려왔다. 독자 여러분이 아시듯 자포이킨은 결혼식이나 기념일, 장례식 등에서 즉흥 연설을 할 수 있는 드문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취침중이거나 배가고플 때, 만취를 했거나 고열이 날 때 등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말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이다. 그의 연설은 수도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부드럽고 거침이 없으며 내용도 풍부하여, 그의 연설집에는 어느 식당의 바퀴벌레보다도 더 많은 감동적인 어휘들이 있다. 그의 연설은 언제나 능변에다가 끊임이 없어, 어떤 경우 특히 상인들의 결혼식 축사의 경우는, 축사를 중단시키려면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를 본 포플라프스키가 말했다.     “친구, 자네를 만나러 왔네.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고 나를 따라오게. 내 친구가 죽었어. 방금 묘지로 출발을 했는데, 자네가 가서 간단한 추도사를 해주어야겠네. 자네야말로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지. 망자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면, 자네를 괴롭힐 일이 없겠지만, 자네가 알다시피 그는 서기, 그러니까 우리 사무실의 기둥이었다는 말일세. 그런 큰 인물을 추도사 한마디 없이 매장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자포이킨이 탄식조로 말했다.     “아, 그 서기! 그 주정뱅이 말이지?”    ...

왕조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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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멸망           프랑스 대혁명(1789), 러시아 혁명(1917),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동학 혁명(1894)은 모두 왕조의 멸망을 가져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사건들의 핵심은 개혁이었으며,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혁명의 당사자로 처형된 루이16세는 개혁을 원했지만 특권적인 교회와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는 결국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러시아 알렉산더III세와 니콜라스II세는 알렉산더II세의 개혁을 되돌려 놓은 반개혁 황제들이었다. 자신을 학대한 부친을 죽인 혼외정사의 아들 스메르자코프 카라마조프를 통해, 혼외자식 학대하듯 백성을 학대하는 황제는 언젠가 백성들의 손에 죽을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암시하지만 황제는 알아듣지 못했다. 니콜라스II세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 1918년 가족과 함께 총살된다. 청조는 한족에 대한 차별과 서구 열강의 침탈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아편전쟁(1839-1842)에서 영국에 대한 굴욕적인 패배와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결국 홍수전의 반란(1850-1864)을 불러왔다. 수많은 민란을 간과했던 청조는 뒤늦게 개혁(양무운동)에 손을 댔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나마 보수 세력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받았다. 양무운동(1861-1894)은 또 백성을 위한 당장의 시급한 개혁이 아닌, 초점을 벗어난 장기 부국강병 개혁이었다. 홍수전의 난으로 국력이 약화된 청조는 결국 막을 내린다.           동학 혁명(1894)은 갑오경장이라는 개혁을 가져왔지만 이 역시 때가 늦어 미구에 왕조가 멸망하는 것이다. 시기를 잃은 개혁은 오히려 위기를 부른다는 토크빌의 (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프랑스 역사학자)말이 증명된 것이다. 이 네 사건들의 공통점은 개혁이고, 개혁에 실패함으로서 한 왕조의 몰락은 ...

십자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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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이름으로      라틴 아메리카에는 모두 49개 국가가 있다. 캐리비언에 28개, 대륙에 21개이다. 2024년 말 현재 총 인구는 약 6억2천만 명 정도로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면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이 대륙이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      콜럼버스는 역사상 누구보다도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히틀러보다도 그에 관한 저서가 더 많다. 밀튼의 실낙원이나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서도 그를 언급하고 있으며 드볼자크의 신세계 교향곡-1892년 신대륙 발견 4백주년 기념 음악이다-은 그에게 헌정된 음악이다. 그는 열정적인 기독교인으로 중세적 유심론자이며 현대적 경험론자인 동시에 이태리의 영웅이지만 제국주의적 악당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찌됐던 그는 1492년 그의 항해를 통해 세계를 바꿔놓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럽에 번영을 가져다 준 건 산업혁명이 아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도 있다. 그때 이 발견이 없었다면 유럽은 아직도 아시아 대륙의 구석진 끝자락에 뒤쳐진 대륙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콜럼버스는 이태리 제노아 출신으로 1451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콜럼버스 출생 2년 후인 1453년 오토만터키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였다. 따라서 동방무역의 종착역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손에 떨어졌다. 유럽인들의 동방 무역의 길이 막힌 것이다. 따라서 서쪽으로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대륙 발견의 동인이다.      콜럼버스의 시대 일반 대중은 지구가 평평하여 대양의 끝에서는 바닷물이 폭포처럼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지만 또한 지식인들은 지구는 둥글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주장을 믿었다....

러시아 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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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제국의 멸망 1. 개혁      러시아 제국 멸망 전 50년은 농노해방으로 시작한다. 1861년 2월9일 농노해방 선언이 있었다. 표면상 대개혁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2천만 명 이상의 농노가 자유를 획득하였다. 이들의 무산 계급화를 방지하기 위해 해방된 농노들에게는 한 사람 당 약간의 토지가 주어졌다. 그 대신 농노의 소유주들이었던 지주들에게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가 면제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지방 행정기구의 미비로 지방의 질서 및 행정은 지주들의 책임이었다. 지주를 대신한 지방자치행정기구(Zemstvo, local assembly)는 1864년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다. 젬츠보는 선거로 뽑은 지방의 유지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경찰업무, 행정, 보건의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들의 권한은 제한된 것이었다. 그 활동 역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었고, 또 조세부과권 역시 정부 소관이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젬츠보를 이용하려고 했고, 이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방행정기구의 재조직과 더불어 사법제도의 개혁이 있었다. 배심원 제도와 판사의 영구직, 양심적이고 유능한 재판관 선정 등 정부는 서유럽국가들 보다 더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재판제도를 확립하기도 했다. 피고인의 인격 존중과 변호사 선임권으로 원고와 공정한 다툼이 가능하도록 했다. 변호인에 관한 규정은 재판 절차의 수준을 높여, 재판을 공개하여 방청객이 재판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했다. 형사법에 심리적인, 사회적인 고려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농민들은 이 같은 새로운 사법제도의 밖에 있었다. 농민이 당사자인 재판은 특별법원의 소관이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일반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현대적인 민법전의 미비로 지방재판소는 관습법에 의존했는데, 관습법은 지주 위주였으므로 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