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포아 선언

   

     빌포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영국 외상 발포아(Arthur J. Balfour, 1848-1930))가 쓴 한 장의 편지 때문이다. 발포아는 유대 가문의 수장인 로스 챠일드에게 그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다음 팔레스타인 땅 그러니까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새 나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건국을 반대한 유대인들도 많았다. 러시아 유대인들이 그들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그러니까 발포아 선언 당시 러시아에는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새 나라 건국에 대해 그들은 비 유대 유대인(Non-Jews), 프로레타리아 유대인, 시온주의자 유대인 등 세 부류로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우선 비유대 유대인(Non-Jews)들이다. 이들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유대교도가 아닌 그러니까 이념적으로는 유대인임을 스스로 부정한 인텔리겐챠, 공산주의자, 유대 정치인들이다. 혁명 주체인 볼쉐비키당 지도부의 20%, 공산당원,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 박해 기구인 예프세크치야 (Yevsektsiya) 조직원 30만 명 그리고 공무원, 세무서원, 비밀경찰 등에 많은 비유대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유대 국가를 세우는 것은 혁명에 대한 반동이며 따라서 건국을 바라는 시온주의자들을 계급의 적으로 불렀다. 그 다음 무산 유대인(Proletariat Jews)들로, 그들은 국가란 랍비나 유대 부르좌지의 이익을 위한 조직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대했다. 그러니까 시온주의 유대인들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열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국가 건설은 전 유대인의 컨센서스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냥 두어도 되었을 일을 발포아는 유대인,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화근이 될 약속을 했던 것이다. 왜 그런 약속을 했을까?

    와이즈만(Chaim Weizman)이라는 맨체스터 대학의 유대인 생화학 교수가 있었다. 그는 열렬한 시온주의자로 영국 지도층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좋은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그는 보수당 지도자이며 시온주의 지지자인 발포아(Arthur Balfour), 처칠(Winston Churchill), 조지(Lloyd George)등과 친분을 맺고, 이어 유대인 하원의원 사무엘(Herbert Samuel Montagu)을 만난다.

    사무엘은 영국 내각의 각료가 된 최초의 유대 정치인이다. 와이즈만의 말을 들은 사무엘이 어느 날 영국 외상 그레이(Edward Grey)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1차대전이 끝나면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취하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가진다는 의견을 교환했다. 나중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 합의(Sykes-Picot Secret Agreement, May 19, 1916)를 통해 이 의견을 받아 들였다. 이-팔 분쟁 이면에 제국주의적 영토 야심이 깔려있었다는 말과 같다. 이 비밀 합의는 전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June 28, 1919)에 구체화되었다.

    사무엘은 또 재무상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에게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하였다. 열렬한 성경 신봉자이며 시온주의에 공감하는 로이드 조지가 수상이 되면서 그의 내각에 발포아가 외무상으로 임명되었다. 사무엘과 와이즈만의 계획이 착착 진행된 것이다. 1914년 12월 12일은 한 사람의 로맨틱한 감정에 의해 이-팔의 운명이 결정된 역사적인 날이다. 그날 와이즈만은 다음과 같이 발포아를 설득했다.

 

        ‘유대인들은 독일의 산업계, 문화계,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이 같은 유대인의 능력 발휘는

        독일인의 신분으로 독일의 번영을 위한 것이지, 독일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독일인들은

        유대인의 능력과 두뇌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습니다. 독일의

        번영에 엄청난 공헌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비극은 그들이

        독일인도 유대인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발포아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와이즈만의 손을 잡았다. 와이즈만은 영국의 적국인 독일에 대한 발포아의 적개심에 호소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발포아는 확고한 시온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새 나라 건설에 관한 계획을 내각에 제출했을 때, 역시 정치인이며 극단적 반시온주의자인 그의 사촌 에드윈(Edwin Samuel Montagu, 1879–1924))이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어쨌든 새로운 유대국가 건설에 와이즈만과 로이드 조지는 의기투합했다. 그렇지만 반 시온주의자인 전임 수상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에 따르면 로이드 조지는 유대인 보호보다는 성지 예루살렘에 프랑스의 진출을 막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당초 발포아 초안이 바뀐 점이나 또 그 문안에 “나라(country)” ,라는 어휘 대신 ‘유대 민족의 귀향지(the national home of the Jews)’ 라는 문구로 보아 애스퀴스의 말은 사실인 듯하다.

    1917년에 들어 시온주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March 15, 1917)하면서 비유대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반유대법이 폐지되고, 독일의 유보트 공격에 따라 미국이 참전(April 6, 1917)한다. 미국 역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1917년 7월 18일, <발포아 선언>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그 초안은,

    1. 유대 민족의 귀향지로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재건

    2. (귀향지로) 유대인의 무제한 이주

    3. 자치 인정

등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이는 시온주의자들의 완전한 승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윈 몬타구의 반대로, 그 내용이 변경되었다. 에드윈 몬타구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1917년 10월 31일자의 안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곧 유대인의 귀향지라는 말이 없었고 유대인의 무제한 이주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는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뒤 11월2일 최종 안에는 10월31일자 안이 수정된 다음과 같은 문안을 담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귀향지(national home) 건설에 호의를 가지고 유의하며(view with favor),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시민권과 종교권,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들의 권리와 정치적인 지위를 해치는 어떠한 일도 없을 것임을 명백히 이해한다.’

    이처럼 같은 땅에 양측을 모두 보호하겠다는 양립할 수 없는 선언을 한 것이다.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합의한 대로 종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고 시리아, 레바논은 프랑스가 취했다. 발포아가 약속한 대로, 팔레스타인 민족이 살고 있는 땅에 유대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미 살고 있었던 10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있었고, 이 인구 규모로는 나라가 설 수 없어 국가 건설이 미루어졌다. 그 후 유대인의 계속적인 유입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 인구는 60만명이었다.

    이 분쟁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토 욕심과, 물론 내각의 승인이 있긴 했지만 네 사람(와이즈만, 사무엘, 발포아, 에드윈)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편으로 갈라져 감상에 젖어 처리한 결과라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이-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 원인이다. 이 트릿한 문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고 있고 앞으로 죽을 것이다. 만일 이 발포아 선언이 없었더라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건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c)

Written by Ex-Director 
        of Kotra Israel Div.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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