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
by
Aristo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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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관이 어떠했는지, 지금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개략적으로 살펴 볼 수가 있다.
제1권
인간의 모든 활동은 우리가 선善이라고 부르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가장 고귀한 목적은 그 자체가 목표이지만, 보다 낮은 목적들은 단지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그 같은 가장 고귀한 목적들이야말로 바로 지고至高의 선임에 틀림없다.
선에 관한 연구는 정치학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정치학은 인간의 삶을 위한 최고의 목표를 획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학은 정밀한 과학이 아닌 바, 이는 한 사람에게 최고의 것은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개략적인 선의 외양만을 목표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이 최고의 선임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행복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을 감각적인 즐거움과 같은 것으로 여기나 이는 동물에게나 해당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은 보다 높은 목적이 있다. 명예를 얻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명예는 선을 깨달음으로서 획득 것이니 만큼, 이러한 명예가 주는 보다 큰 선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단 하나 ‘선의 이데아’가 존재하며, 모든 선한 것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선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다’고 일컫는 대상들이 다양하고, 선함을 고찰하는 방식이 다양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론은 결함이 있을 수도 있다. 설령 단 하나의 동일한 선의 형태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관심사는 어떻게 선하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질적인 문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추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기에 최고의 선이다. 지성과 덕성은 그 자체로서만 선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도 선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플루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은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이다. 플루트 연주는 플루트 연주자의 일로, 이는 바로 그들의 고유한 활동이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그러므로 최상의 선은 이처럼 덕에 부합하는 이성적인 영혼의 활동이어야 한다. 이는 덕이 있고 이성적이며 활동적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대중의 행복관과 일치한다.
행복에 관해 논할 때, 우리는 삶의 단편적인 순간들이 아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본다. 이는 한 사람의 행복 여부는 오직 사후 즉,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온전히 살펴볼 수 있게 된 시점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언제나 덕스럽게 행동한다. 설령 큰 불행이 닥치더라도, 선한 사람은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비열하게 추락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한 사람의 사후에 밝혀지는 영예나 불명예 그리고 후손들의 행위가 그의 행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했다.
영혼은 비이성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비이성적 영혼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영양 섭취와 성장을 담당하며 덕(德)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식물적 측면’과, 우리의 충동을 담당하는 ‘욕구적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 이성적 부분은 비이성적 충동을 통제하므로, 비이성적 능력보다 이성적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으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충동을 더욱 잘 제어할 수 있다.
제2권
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지성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이다. 우리는 가르침을 통해 지적 덕목을, 습관과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도덕적인 덕목을 배운다. 우리 모두는 도덕적인 존재가 될 잠재력을 타고나지만, 올바르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를 단련하여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가가 악기 연주를 공부하듯, 우리도 생각이 아닌 실천을 통하여 도덕을 배우는 것이다.
현실은 그 상황이 매우 다양함으로, 현실 속에서 절대적인 행동 규칙은 없다. 다만 올바른 행위란 결핍과 과잉(부족함과 지나침)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있는 중용으로 이루어졌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들어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 사이에 있으나, 용기는 상황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
쾌락과 고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도덕성을 기르기 위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대식가는 음식을 마주했을 때 쾌락을, 박탈을 당하면 고통을 느끼는 반면 절제 있는 사람은 지나친 음식을 삼가면서 쾌락을 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 있는 사람과 어쩌다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세 가지 기준이 있다고 했다. 먼저, 덕 있는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둘째, 그들은 덕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한다. 셋째, 그들의 행동은 확고하고 덕스러운 성향으로 드러난다.
개인의 덕은 하나의 성향으로,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다. 개인의 감정은 미덕이나 악덕과는 달리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하며, 덕은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역량이 있지만, 덕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고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성향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덕을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성향이자, 모두 악덕에 해당하는 부족함과 지나침이라는 양 극단의 중용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살인이나 간통과 같은 행위는 언제나 그릇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요 덕목들 중 일부를 그에 상응하는 부족함과 지나침이라는 극단을 함께 나열하고 있다. 어떤 극단들은 중용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예를 들어, 무모함은 비겁함보다는 용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는 용기가 비겁함보다는 무모함에 더 가깝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 대부분이 무모하기보다는 비겁해지려는 경향이 더 강하여, 용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실천적 행동 규칙을 제시한다. 첫째, 평균(중용)에서 멀리 떨어진 극단을 피하라. 둘째, 우리가 특히 빠지기 쉬운 오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피하라. 셋째, 쾌락을 경계하라. 쾌락은 종종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3권
타인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 행동이 자발적인지 아니면 비자발적인 지에 좌우된다. 하나의 행동이 강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타인에게 고통의 원인인 될 때 비자발적인 행동이다. 위협을 받아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강요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행위자가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경우 우리는 자발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무지에서 비롯된 행위는 나중에 그 무지를 깨달았다면 비자발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무지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로 인해 고통 받지 않는다면 자발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는 오직 특정 경우만을 정당화할 수 있을 뿐 일반적인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데, 이는 선善에 대한 일상적인 무지야말로 바로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선량함의 가장 좋은 척도는 선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와 달리, 선택은 언제나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선택한다. 선택에 앞서 숙고를 하며, 숙고는 우리가 어느 정도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올바른 수단이 명백하지 않을 때 숙고를 하게 된다.
숙고는 분석적 방법에 따라 진행된다. 우리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숙고한 다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생각한다. 수단을 선택을 할 때,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이들은 언제나 선(善)을 지향할 것이다. 그러나 품성이 올바르지 못한 이들은 사물을 잘 못 이해하여, 겉보기에 좋은 것만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덕과 악덕은 모두 우리의 자발적이고 신중한 선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 인간 능력의 범위 내에 있다. 이 같은 결론은 보상과 처벌은 오직 자발적으로 행한 행위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나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고치기 어려운 나쁜 습관을 형성하지만, 그들의 자제력 부족이 그들의 나쁜 행실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고찰한 뒤, 자신이 정의한 용기로 개개의 덕을 고찰하였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치심이나 가족을 향한 잔혹함은 용기가 아니며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용기란 두려움에 맞서는 자신감을 의미하며, 이는 명예로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쟁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두려움이 지나치면 비겁함이라는 악덕이 되고, 부족하면 무모함이 된다.
특정 성향들은 용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용기가 아니다. 불명예가 두려워 싸우는 병사, 허위 경보를 접하고도 두려워 하지 않는 노병, 분노나 고통 때문에 격앙된 병사,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두려움을 모르는 낙천적인 사람, 그리고 직면한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병사는 용기 있는 자가 아니다. 용기는 고통을 견뎌내는 일을 수반하기 때문에, 어렵고도 칭찬 받을 만한 미덕이다.
절제는 신체적 쾌락에 관하여 중용의 상태인 반면, 방종은 신체적 쾌락을 지나치게 갈구하는 악덕이다. 가장 저급한 쾌락은 미각과 특히 촉각에서 비롯되는 것들로, 방종의 원천이 되기 가장 쉬운 것들이다. 방탕한 사람은 육체적 감각에 대해 지나친 쾌락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쾌락을 박탈 당했을 때 또한 지나친 고통을 느낀다. 쾌락의 결핍이라고 하는 말은 악덕으로, 워낙 희귀하여 별도의 이름조차 없지만 굳이 부르자면 ‘무감각’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절제 있는 사람은 오직 건강과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적절한 양의 쾌락을 느낄 것이다.
제4권
제3권에서 용기와 절제에 대해 논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머지 덕목들을 하나씩 고찰한다.
마음이 후함은 금전 지출에 관한 올바른 태도이며 낭비는 (마음이)지나침을, 인색은 부족함을 나타낸다. 후한 사람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액수의 돈을 베풀어, 베푸는 일 자체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마지못해 돈을 베푸는 것은 후하지 못한 징표이다. 돈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갖지 않는 관대한 사람은 자원을 잘 관리하며, 낭비벽이 있는 사람처럼 돈을 함부로 탕진하지 않는다. 낭비는 인색함보다 낫다. 왜냐하면 낭비는 악덕이 아닌 어리석음의 소산으로 쉽게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덕함이란 일상적인 금전 지출과 관련된 말이고, 장대함이란 공공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증여하는 덕목이다. 장엄하려면 탁월한 안목이 요구된다. 요란스럽게 부를 과시하는 행위는 천박한 일로 악덕을 드러내는 것이고, 비용을 아끼려다 전례를 망치는 일은 옹졸함의 징표이다.
후덕함이란 자신이 큰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아는 사람의 품성이다.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자만을 하는 것이고, 과소 평가를 하면 소심한 사람이다. 허영심이나 소심함은 나쁘다기보다는 그릇된 것으로, 대체로 소심함이 더 나쁘다. 도량이 넓은 사람은 위대한 사람으로,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음을 알기에 영예를 받아들이지만, 그 영예로부터 지나친 즐거움을 취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량이 넓은 사람에 대해 “그의 걸음걸이는 절도 있고, 목소리는 깊으며, 말씨는 서두르지 않는다” 라고 했다.
사소한 명예에 관해서라면, 지나친 야망과 전무한 야망 사이에는 중용이 존재한다.
분노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인내와 유사하지만, 때로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적절한 경우도 있기에 인내가 지나치면 오히려 결점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지나친 다혈질은 성미가 급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앙심을 품거나 지속적으로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게서 그 폐해가 드러난다.
상냥함, 진실성, 그리고 재치는 중요한 미덕이다. 상냥함은 적절한 사회적 처신을 보여주는 덕스러운 자질이다. 지나치게 남을 기쁘게 하려는 열의는 비굴함이나 아첨으로 드러나는 반면, 퉁명스럽거나 다투기 좋아하는 태도는 상냥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실성 혹은 성실함은 자기 비하라는 결핍과 허풍이라는 과도함 사이의 바람직한 중용의 상태이다.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지나치게 가식적이지만 않다면 용인될 수 있으며, 특히 부당한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행하는 자기 자랑보다는 확실히 더 바람직하다.
재치는 훌륭한 대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재치가 결여된 사람은 무덤덤하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기분을 상한다. 반면, 웃음을 얻기 위한 지나친 농담은 결점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적절한 재치를 발휘하려면 날카로운 판단력이 필요하다.
겸양은 엄밀히 말해 덕목이라기보다는 올바른 가정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다. 겸양은 적절한 때 느끼는 수치심으로 이루어진다. 덕이 있는 사람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으므로 겸양이 필요 없겠지만, 젊은이는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할 때 수치심을 느껴야 비로소 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5권
부정의란 곧 불법과 불공정을 의미하므로, 정의는 합법성 이나 공정성을 뜻한다. 법은 사람들이 덕스럽게 행동하도록 장려하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합법적인 존재인 만큼 필연적으로 덕스러울 것이다. 덕은 개인의 도덕적 상태인 반면, 정의는 타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덕과 정의는 구별된다. 보편적 정의란 한 사람이 법을 잘 준수하고 공정한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특수 정의는 명예, 금전, 안전 등과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가치들을 한 사람이 모두 차지하게 되면 다른 누군가는 이를 잃게 된다.
특수 정의에는 분배 정의와 교정적 정의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분배 정의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부의 분배를 다룬다. 분배 정의는 기하학적 비례를 적용한다. 즉, 각자가 받는 몫은 그 사람의 공적에 정비례하므로,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보다 더 많은 몫을 받게 된다. 이 정의는 마땅히 받아야 할 몫보다 더 많이 주거나 덜 주는 두 가지 사이의 덕스러운 중용이다.
상품 거래 같은 자발적 거래나 절도나 폭력 같은 비자발적 거래에 따른 부정의의 경우, 이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 교정적 정의는 두 사람 사이의 이득과 손실의 불균등을 바로잡는다. 재판을 통해 정의가 회복되며, 이때 판사는 양 당사자의 이득과 손실이 상쇄되도록 하여 균형 점(평균)을 찾아 준다.
정의는 비례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제화공과 농부의 경우, 신발과 수확물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신발 한 켤레와 수확물 한 번을 교환할 수 없다. 오히려 제화공은 농부가 제공하는 농작물의 가치에 비례하는 수의 신발을 내주어야 한다. 화폐는 다양한 재화에 대한 수요를 반영하며, 공정한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
정치적 정의와 가정의 정의는 관련을 맺으나, 구별된다. 정치적 정의는 법의 지배를 받으나, 가정의 정의는 존경에 보다 더 의존한다. 정치적 정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자연법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특정한 법적 관습(관습법)에 기초한다.
행위자는 오직 자발적으로 저지른 불의한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무지에서 비롯된 불의는 ‘실수’라 부르고, 계획이 어긋나 발생한 불의는 ‘불운’이라 부르며, 고의는 있으되 사전 모의는 없이 저지른 불의는 ‘상해’라 부른다. 무지는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책임이 면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누구도 스스로 불의를 원하지 않으며, 재화가 부당하게 분배될 때에는 가장 큰 몫을 받은 사람보다 분배를 한 자가 더 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정의란 단지 법에 복종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정의는 오직 덕스러운 성품에서만 비롯되며, 덕이 결여된 사람은 어느 경우든 정의로운 행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법은 항상 완벽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법률이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지 못할 경우, 그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형평이 필요하다. 따라서 형평은 법적 정의보다 우월하지만, 절대적 정의보다는 열등하다.
자기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부당함이란 한 사람이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이득을 취하는 것임으로,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 자살의 경우조차도, 인적 손실이라는 국가의 손해이다.
제6권
우리는 덕이란 양 극단의 중용을 선택함으로써 생겨난다는 말을 들어왔다. 우리는 덕을 배우기 전에는 알 수가 없음으로, 올바른 덕의 원칙을 배우려면 무엇이 덕목인지를 알아야 한다.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이성적 부분은 과학과 수학의 불변하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색적인 부분과, 인간 삶의 실천적 문제들을 다루는 계산적인 부분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사색적인 지성과 관련된 올바른 추론은 진리를 가져온다. 실천적 지성과 관련하여 올바른 추론은 바로 올바른 선택을 가져오는 올바른 숙고이다.
영혼으로 하여금 진리에 도달케 하는 다섯 가지 지적 덕목이 있다. 첫째, 과학적 지식은 연역이나 귀납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 둘째, 예술 또는 기술적 숙련은 올바른 이성에 따른 생산을 가져온다. 셋째, 신중함 또는 지혜는 우리가 좋은 삶을 추구하도록 도움을 준다. 넷째, 직관은 과학적 진리 발견의 토대가 되는 1차적 원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섯째, 지혜는 과학적 지식과 직관이 결합된 것으로, 우리가 만물의 가장 높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치적인 학문은 도시 전체의 선한 삶을 보장하는 일을 다루기에, 일종의 지혜라 할 수 있다.
깊은 사색은 과학적 지식이나 의견, 추측과는 다르다. 이는 신중히 구상한 목적을 달성토록 돕는 과정이다. 이해를 했다는 것은 실천적 사안에 대한 하나의 판단으로, 무엇이 공정한 지를 판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판단력, 이해력, 신중함, 직관은 모두 올바른 행동을 결정토록 돕는 천부적인 재능이다.
지적 덕목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정의롭고 칭찬할 만한 것인지 알도록 도와주며, 도덕적 덕목은 우리가 올바르고 칭찬 받을 만한 행위를 하도록 도와준다. 지식은 그에 따른 행동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니, 과연 지적 덕목이 지니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첫째, 지적 덕목은 행복으로 인도함으로, 따라서 그 자체로 목적이다. 둘째, 지적 덕목은 도덕적 덕목이 가르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결정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신중함과 현명함이 없으면, 선한 사람일지라도 결코 덕스러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적 덕목들은 우리가 올바른 행동 원칙을 알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7권
사람의 성격에는 세 가지 악성이 있는데 바로 악덕, 절제력 부족, 그리고 야만성이다. 이 세 가지와 대립하는 것은 덕, 절제, 그리고 초인적인 덕이다. 이제 우리는 절제력 부족과 유약함, 그리고 그 반대인 절제력과 인내를 고찰해 본다.
절제력 부족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절제력 부족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무지 때문인가, 아니면 알고도 그러는 것일까? 절제력 부족과 방탕은 어떻게 다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무엇이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이다. 둘째, 절제력이 결여된 사람은 사실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잘못된 추론을 내릴 수 있다. 셋째, 절제력이 없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여 명확한 사고를 못할 수 있다. 넷째, 욕망으로 인해 신중한 생각 없이 성급히 행동할 수 있다.
승리, 명예, 혹은 부가 주는 쾌락에 대해 지나친 욕망을 보이는 사람은 ‘절제 없는 자’ 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승리에 관하여 절제 없는 자’라고 하는 식이다. 이와는 달리 성이나 음식과 같은 신체적 쾌락에 대해 지나친 욕망을 보이는 사람은 그냥 단순히 ‘절제 없는 자’ ,라고 부른다. 방탕과 자제력 결핍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방탕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 자제력이 결연된 사람은 자기 통제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욕망보다 성질 때문에 자제력을 잃는 것이 더 용서 받을 만하다.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성적이지만,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제력이 없는 상태가 방종한 상태보다 더 낫다. 자제력의 결여로 인해 나쁜 일을 저지르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절제는 인내보다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절제는 욕망의 유혹을 견뎌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인내의 반대말은 나약함으로,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조차도 견뎌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방탕한 사람은 자제력이 없는 사람보다 더 쉽게 교화될 수 있다. 이는 그가 선택에 따라 행동하며 이성적인 설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탕한 사람은 사악하지만,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사악하려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사악한 행위를 저지른다.
많은 철학자들은 쾌락에 비판적이다. 절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쾌락은 사고를 흐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목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며, 쾌락을 부정한다. 또 쾌락은 수치스럽거나 해롭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을 과정이 아닌 목적이라고 했다. 즐거움은 오직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해로울 뿐이며, 묵상은 최상의 즐거움으로 어떤 의미에서든 해롭지 않다. 사실, 좋은 삶이라는 지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즐거운 활동이며, 우리는 바로 그 삶이 즐겁기 때문에 좋은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은 모든 것 중 가장 으뜸가는 선이다. 신체적인 즐거움은 지나칠 때에만 해롭다. 그러나 체적인 즐거움보다는 정신적 쾌락이 더 바람직하다.
제8권
우정은 분명 필수적이고 훌륭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 정확한 본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우정은 두 사람 사이의 선의로 이루어진다.
우정에는 세 종류가 있다. 먼저 유용성에 기초한 우정으로, 두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즐거움에 기초한 우정으로, 두 사람이 서로의 재치, 준수한 외모, 또는 그 밖의 즐거운 자질들에 이끌리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선(善)에 기초한 우정으로, 두 사람이 상대방의 선함을 존경하며 상대방이 선을 추구하도록 돕는 우정이다.
처음 두 가지 유형의 우정은 상대방의 본성에 내재된 본질적인 요소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유용성과 쾌락에 따른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우정은 모두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데, 이는 사람의 필요와 즐거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선함은 변치 않는 자질이기에, 선함에 토대를 둔 우정은 오래 지속된다. 이 같은 우정은 서로에게 유익하고 서로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정은 드물고 싹트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단연코 가장 훌륭한 우정이다. 나쁜 사람들도 쾌락이나 실리를 이유로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대체로 우정은 유용성, 즐거움, 혹은 선함을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지위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도 있다. 바로 부자(父子), 부부, 그리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각 당사자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우정이 요구되며, 이 경우 우정은 각자의 가치에 비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신하는 군주로부터 받는 사랑보다 군주를 향한 사랑을 더 많이 보여야 한다. 사람들 간 격차가 지나치게 크면 우정은 불가능하며, 한 사람이 상대방보다 훨씬 더 덕스러워지면 두 사람은 서로 멀어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기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은,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정은 서로를 사랑할 때 지속된다.
정의와 우정은 둘 다 공동체를 결속시킨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가까운 친구나 가족 구성원에 대한 학대는 낯선 사람을 학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
정치 체제에는 군주정, 귀족정, 금권정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전제정은 군주가 신민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군주정의 타락한 형태이다. 과두정은 귀족정의 타락한 형태이고 민주정은 명예정Timocracy의 타락한 형태이지만, 그 어느 것도 전제정 만큼 나쁘지는 않다. 군주정은 부자 관계에, 귀족정은 부부 관계에, 그리고 명예정은 형제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부패한 정치 제도는 마치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정은 쓸모를 따질 때 문제가 발생한다. 불평등한 우정에서는 각자가 적절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은 은인에게 돈을 줄 수는 없지만 명예롭게는 할 수 있다.
제9권
우정 관계나 인간 관계에서 서로 받는 혜택이 다를 경우는, 자신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전에 혜택의 가치를 정해 두는 것이지만, 보답하기 어려운 혜택도 있다. 분쟁이 발생할 경우, 혜택의 가치는 그것을 제공 받은 당사자가 판단해야 한다. 친구를 우대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타인에 대한 의무를 제쳐두고 까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쾌락이나 유용성에 기초한 우정은 그런 것들이 사라질 때 해체된다. 어떤 특성이 아닌 인격으로 인해 사랑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 같은 우정의 해체는 더욱 복잡해진다. 자신의 본 모습을 왜곡하여 보여주었던 사람과의 우정은, 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멀어진 친구는 더 이상 친구로 남을 수 없겠지만, 예전의 우정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려는 여전히 간직해야 한다.
우리가 친구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다. 예를 들어, 좋은 친구는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고,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며, 개인적인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우리는 어떤 장점이나 선함을 지닌 인물을 보았을 때 그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이는 피상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우정이나 애정과도 구별된다. 화합이란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을 지향할 때, 친구들 사이에서 또는 국가 내부에서 형성되는 우호적인 감정의 한 형태이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받는 사랑보다, 자신이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듯 보인다. 그의 사랑은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향해 품는 사랑과도 같다. 왜냐하면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은혜를 입는 자를 ‘만들어내는’ 데 어느 정도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또한 선을 받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다.
자기애를 폄하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최고의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애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은 자신에게 좋은 일을 추구하며, 이는 모두에게도 좋다. 선한 사람은 친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거나 돈을 기부하는 등 이타적인 행위를 하며, 이는 그러한 행위가 고귀하고 자기애에 동기를 두기 때문이다.
만약 선한 사람이 자족적이라면, 그에게는 친구가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우정은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善) 중 하나이기에, 선한 사람은 친구 없이는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없다.
물론 친구가 많은 것이 좋겠지만, 한 사람이 유지할 수 있는 친밀한 우정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수많은 피상적인 우정보다는 소수의 가까운 우정을 갖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친구는 역경 속에서 더욱 필요하지만, 좋은 환경에서 우정은 더욱 즐겁다. 역경에 처할 때 우리는 타인들이 그 역경을 함께 해주기를 원치 않으나, 번영의 때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가 있다.
제10권
플라톤 아카데미의 회원인 에우독수스(Eudoxus, 390~340 BC. 플라톤의 제자. 천문학자, 수학자, 의사 및 법률가)는 쾌락이야말로 다른 좋은 것들을 더욱 바람직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최고의 선이라고 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쾌락을 더욱 바람직하게 하는 건 지성 등 다른 요소들이라며, 따라서 쾌락은 최고선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쾌락이 또는 어떤 쾌락이 나쁘다는 주장도 결함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쾌락이 정신 활동에 불완전한 재충전 과정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쾌락적인 삶이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쾌락적인 삶이 좋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아이의 정신 상태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쾌락이 아니라도 지능이나 좋은 시력처럼 좋은 것들이 있다. 모든 쾌락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며, 쾌락이 지고의 선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러나 삶 그 자체가 하나의 활동이기에 쾌락은 삶에 필수적이다. 오직 선한 사람이 올바른 이유로 누리는 쾌락만이 선한 쾌락이다.
행복은 우리 삶의 지고의 목표이다. 그러나 행복을 즐거운 오락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행복의 최상 형태는 사색이다. 사색은 우리의 가장 고귀한 이성적 활동이다. 오직 신만이 영원한 사색에 전념할 수 있겠지만, 우리 또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 같은 신적인 활동을 닮으려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한 업적은 사색의 결과이다. 모든 도덕적 덕목은 필수적이기는 하나 사색이라는 신적 활동에 비해서는 부차적인 것이다.
행복에 대해 배우는 것만으로도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철학적 담론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말만으로는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선은 실천과 습관화가 필요하며, 오직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의 내면에만 그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덕스럽기가 어렵기 때문에, 국가는 젊은이들이 올바른 교육을 받고 성인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할 책임이 있다. 훌륭한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녀와 친구들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의 감독은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점에서 법보다 더 바람직하다.
정치인도 소피스트도 모두 정치를 가르치는 일에 적합하지는 않다. 어떤 법이 시민들에게 유익한가를 판단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정치를 감시하는 일이다.(C)
Written by Hung S.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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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고대 그리스 철학자. 그는 자연과학, 철학, 언어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예술 분야에 방대한 저서를 남김. 소요학파를 창시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열었으며, 근대 과학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진 인물임.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음. 그는 고전기(Classical period)에 칼키디키(그리스 북부)의 스타기라 시에서 태어남. 그의 부친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나, 그는 후견인의 손에서 자람. 그는 열여덟 살 때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에 입문, 37세(기원전 347년경)가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음. 플라톤 사후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요청에 따라 기원전 343년부터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음. 그는 리케이온에 도서관을 설립함. 이 도서관은 그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수백 권에 달하는 저서들을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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