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버려진 휴지처럼
거리에 버려진 휴지처럼
----------------------
이 글을 쓴 나는 이제 팔순의 나이로,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남긴 글이다. 개인사적인 이야기이나, 그 시대적 배경은 이 글이 약간의 공공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공공성이 있다는 느낌이 이글을 공개토록 용기를 주었다.
I. 노동
나의 고향은 경기도 어느 곳 "노동"이다. 열세 살에 그곳을 떠나 다시 가 본 적이 없으니, 현실의 고향이라기보다는 유년의 기억 속에 화석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추억의 고향이 아닌 슬픔과 무서움, 전설 속의 이야기 같은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다. 기억력이 총총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니,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농부들이 흘린 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 이 우울한 이름의 마을은,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어느 외진 곳이다. 낮은 산 뒤로 조금 높은 산, 그 뒤에 훨씬 높은 산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 어린 나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 그 높은 산 너머로 매일 해가졌다. 저 산 너머에는 얼마나 많은 해들이 살고 있을까, 매일 하나씩 넘어가는 해들을 보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산 너머 길로는 해만 넘어간 건 아니었다. 사람들도 넘어갔다. 그 길을 따라 서울로 간 뉘 집 아들딸들이 공장에 취직하여 성공을 했다는 등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 길을 따라 서울로 간 뉘 집 딸은 창녀가 되었다는 우울한 소식도,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들려왔다. 하얀 분을 바른 얼굴로, 눈부신 차림에 고향집을 방문한 그 처녀가, 그 고운 의상의 대가로 자신의 꽃다운 젊음을 거리에서 팔았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니까 그 산은, 그 산을 넘느냐 마느냐로 마을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자였지만, 이 처녀에서 보듯 산을 넘은 사람들이 모두 팔자가 핀 것은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도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 식솔을 이끌고 마을을 떠나 그 산을 넘어 서울로 갔고, 그의 결단은 그 후 70 년이 지난 뒤 나로 하여금 남캘리포니아에서 이 글을 쓰게 한 우리 집으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서향의 우리 집은 낙조가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었다. 일몰과 함께 그 높은 산 위 저녁 하늘에 떠오른 창백한 초승달은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밤이 되면 그 산들은 검고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희미한 밤하늘을 이고 또렸한 능선으로 서 있는 산봉우리들은 여러 가지 이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를 무섭게 했다. 그 생김에 따라 신선 봉, 상여봉, 장수봉, 여우봉, 귀신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은 어느 하나 내가 안심할 수 있는 봉우리가 아니었다. 모두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울긋불긋한 상여가 너무나 무섭고 싫었기 때문에, 그 이름만으로도 상여봉은 낮에도 바라보기가 무서웠다. 밤이 되면 산들이 울었다. 꾸르르, 우르르르..., 산짐승이나 산새들, 바람이 내는 자연의 소리였을 터였지만 귀신이나 도깨비들의 울음이라고 했다. 사람이 쉽게 죽는 시대였고 죽은 이들은 모두 그 산들에 묻혔으므로, 밤이 되면 그들의 혼령이 나와 운다고 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고 아이들은 그렇게 믿었다. 장수봉은 나라를 구할 장수의 출현을 약속한 바위였지만 일본 사람들이 맥을 끊어 장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바위였고 동시에 그들의 무지함을 상징하는 바위이기도 했다. 계곡 이름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를 잡아다가 간을 빼 먹었다는 문둥이 골, 천 년 묵은 지네가 살았다는 지네 골, 산신령 골, 뱀골......,어느 계곡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골짜기 이름이 아니었다. 지네 골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이 한 번 울 때마다 커다란 지네가 한 발짝씩 우는 아이 집으로 다가 온다고 했다. 내가 울면 어머니는 ‘아가야, 저기 지네가 온다’ 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실제로 지네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그러나 그 소리는 물론 바람에 우는 문풍지 소리라던가 산비둘기 소리 등이었을 것이다. 천 년 묵은 지네가 살았다는 지네 골 전설은, 그 옛날에 제물로 바쳐진 처녀의 용감무쌍한 약혼자가 처녀의 옷을 입고는 지네의 밥그릇, 그러니까 지네 바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식사 차 나타난 지네를 단칼에 두 동강을 냈다는 이야기이다. 후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매우 유사한 것을 알고는 인류의 보편적인 상상력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아름다운 자연이 이처럼 무시무시한 이름들로 불리었을까? 그 옛날 우리 조상님들에게 자연이란 지금처럼 낭만적인 관계가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인식되어 이처럼 무시무시한 이름들로 불리지 않았을까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기도 뱀에게 물려 죽기도 했을 터였으니까.
가을 추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 골의 신령 바위에 제사를 지냈다. 산봉우리까지 거의 곧게 선 암반이었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무당의 인솔 하에, 마을 아낙네들은 떡이며 술동이며 이고 갔다. 남정네들은 노래를 부르며 따라갔다. 제사가 끝나면 울긋불긋한 동그란 모양새의 사탕은 아이들 몫이었다. 상여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나는 상여 색깔의 그 사탕을 싫어했고 그래서 먹어 본 적이 없다.
어느 날-그러니까 한국전쟁 당시였다- 콩 볶는 소리가 산 쪽으로부터 들려왔다. 그리고 검은 비행기 두 대가 곤두박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스탱 전투기였을 것이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며칠 후 우리들은 산딸기를 따러 갔다. 몇 구의 시체들이 냄새를 풍기며 여기 저기 누워 있었다. 검푸른 색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무극리 전투에서 패배한 후 후퇴하다 죽은 인민군들의 시체라고 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처럼 적나라한 시체를 본 적이 없다. 후일 “스탈린그라드” 라는 영화 장면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가는 적군 병사를 보았을 때 내 기억 속의 그 죽은 병사가 오버랩 된 것은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평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려운 이름의 산들은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사시사철 땔감을 주었다. 겨울철이면 산토끼 고기, 꿩 고기 등 화려한 식품도 주었다.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을 때면 이 산들은 바로 생명 줄이나 다름이 없었다. 칡뿌리, 산딸기, 소나무 우듬지, 진달래 꽃......, 우리들은 산으로 가 정신없이 캐고, 부러뜨리고 해서 먹었다. 진달래가 만발한 지네 골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천 년 묵은 지네도 배고픈 밥주머니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슬픔을 누가 알았으랴. 배가 고픈 우리들은, 학교로 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산으로 달려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곳은 바로 초근목피의 보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산들은 흐르는 물을 주어 농사도 가능케 했다. 그 물은 동구 밖을 지나 남한강을 향하여 흘러가는 내였다. 하얀 모래 바닥이 들여다뵈는 맑은 물은 여름철이면 우리들의 천국이고 송사리, 모래무지의 천국이었다. 그 물이 만들어낸 웅덩이에서 자란 붕어라던가 미꾸라지들은 굶주린 마을 사람들에게 맛있는 조림의 공급원이기도 했다.
그 마을은 말굽 형의 구릉을 따라 토담집의 초가들이 늘어선 남향의 동네였다. 따라서 동구는 마을 남쪽, 말굽 왼쪽 끝에 있었다. 마을 뒤 구릉에 올라서면 멀리 차령산맥이 보였다. 말굽 안에 몇 배미의 논이 있었고, 그 논들은 동구 밖 남쪽으로 연이어 있었다. 3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두메산골이니 만큼 인구에 비해 경작지가 적었던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도 토지에 의한 계급 사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한국 전쟁 중이었다- 나의 큰아버지네 행랑채 마당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른들 틈새를 헤집고 들여다보았다. 눈에 익은 남자가 기둥에 몸이 묶인 채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마도 깨진 채였다. 머리를 숙인 그에게 몽둥이와 발길질이 쏟아졌다. ‘네 놈이 어쩌자고 그 명단을 작성했느냐?’ ‘글도 모르는 놈이 누구를 시켰느냐?’ 지치고 풀이 죽어 대답한 그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땅을 준다고 해서, 아들놈을 시켜서.’ 가만히 있어도 되었을 나의 할머니 담뱃대가 날아갔다. ‘어쩌자고 네 놈이 우리 아들을 명단에 올렸느냐?’ 대나무 담뱃대가 또 한 번 그의 머리를 향해서 날아갔다. 놋쇠 물 뿌리에 맞은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외아들을 잃을 뻔한 어머니, 끔찍이나 나를 아끼던 자애로운 내 할머니의 폭력적인 모습이었다. 인간의 이중성이랄까? 그는 곧 국군에게 인계되었고, 총살되었다는 소식이 마을에 전해졌다. 지주 명단을 적군에게 제공한 죄였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 보다 더 가난했을 그는 대대로 이어 온 머슴가의 후예였다. 백성의 토지 소유가 거의 불가능했던 이씨 조선 5백년의 유산이 남아 있던 시대에, 아마 그는 가족을 살릴 최소한의 식량 확보에 필요했을 토지에 대한 절망적인 희망이 죄가 되어 목숨을 잃었고, 그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먹을 것이 흘러 넘침에도, 누구나 할 것 없이 땅에 대한 욕망으로 영혼을 파는 배리背理의 땅이 되었다.
부자 지주의 동생이면 우리 집도 마땅히 부자여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같은 마을에는 나의 사촌 형제들과 네 분의 큰 아버지가 있었다. 큰 아버지네들은 집도 크고, 식량도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가 댁에는 수백 년이나 될 법한 묵은 향나무가 있었는데, 위로 솟지 않고 옆으로 누워 퍼져 자란, 굵기가 한 아람은 될 향나무가 있었다. 나는 원래 겁이 많았던 아이였으므로 그 향나무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뒤틀린 생김새에 검은 색깔의 몸통은 용트림하는 무슨 괴물 같았다. 앞선 세대 언제인가 시앗을 본 주인 마나님이, 서방님이 범한 하녀를 그 향나무에 묶어 매질을 해서 죽였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나무였다. 그래서 나는 집안 사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원혼의 원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남의 목숨을 억울하게 빼앗은 사람은 당대가 아니더라도, 그 후손에 이르러 반드시 응징을 받는다고 "나다니엘 호돈"의 소설 “일곱 개 박공의 집”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이 나의 백부에게 절절매고 그도 상놈, 상놈 하면서 상놈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의 아버지도 그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고 절절맸다. 그들은 소작인과 지주 사이였고,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그의 이복동생이었음을 조금 더 커서 알게 되었다. 그곳은 지금으로부터 2백수십 년 전, 나의 11대조 선대가 신임사화인가 뭔가에 연루되어 유배지로 정착한 곳이었다. 좌우로 돌장승이 선 커다란 무덤 속에 누워있는 그는, 박 씨 땅을 밟지 않고는 그 마을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이복형제들의 등쌀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등쌀을 피해 그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가 그를 데리고 서울로 피신을 하여 종로통에서 살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소개령으로 다시 그 마을로 돌아왔던 그는, 그러니까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서울 물을 먹은 젊은이였다. 이미 반세기 전 갑오경장으로 양반제도가 철폐되었지만 아직 반상 의식이 남아 있었고, 서자에 대한 차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시절이었으므로 일 년에 네 가마의 쌀을 생산하는 논이 그가 이복형으로부터 소작지로 받은 것이 전부였다. 성장기에 받은 학대로 인하여 그는 일생을 기가 죽어 살았다. 호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없었고 자식들에게 잔소리라는 게 없었다. 선량하기만 했고 자기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절대로 궁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경제적 능력을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삶의 어려움으로 볼 때 그가 얼마나 양심적이고 착하게 이 세상을 살았는지 이해할 수가 있다. 서자라는 신분으로 시대를 잘 못 타고 태어난 시대의 희생자였다고 할 것이다.
우리 집은 외딴집으로 동구 밖에 있었다. 마을 어귀에 있었으므로, 마을을 들고 나려면 반드시 우리 집 앞을 지나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하루 종일 인기척이 없었다. 유년의 시절 외딴집에서 자란 이 같은 이력은 장차 이런저런 연줄이 없을, 아울러 속박이 적을 내 삶을 위한 준비된 훈련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집 앞이 바로 개활지(논)이었으므로, 마당에서 멀리 차령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아득히 보이는 그 산맥은 항상 푸르스름한 색을 띄고 있었다. 그 산 너머로부터 매일 해가 뜨고, 도대체 누가 매일 그 해를 만들어 보내는지가 내 어린 날의 궁금증이었다.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 사이에 커다란 못이 있었는데, 시집살이를 못 견뎌 또는 이러저러한 일로 뉘 집 누가 투신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 못을 지나노라면 물귀신의 손이 뒤 쫓아 오는듯했던 무서운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집 사립문 밖에 연못이 있었고, 그 가운데 섬이 있었다. 섬이라고 하지만 자그만 흙무덤이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자란 소나무 위에 까치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끔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아 조림을 만들어 주시던, 가난하고 다급했던 부모님은 이제 땅속에 계시다. 길고 긴 여름날이면 그 연못가에서 나는 두 여동생들을 돌보며 일터에 나간 부모님을 기다렸다. 개구리나 물방개를 잡아 구어 먹였던 그 아이들은 다섯 살도 되기 전에, 내 기억 속의 초롱초롱한 별이 되어 땅속으로 떠나갔다. 그 때 우리 어머니의 애통함을 그 아이들을 품었던 대지도 아셨는지, 그 아이들과 놀랄 만큼 똑 같이 생긴 아이 둘이 고추를 달고 이 풍진 세상으로 왔다. 그 연못에는 달도 살고 별도 살았다. 밤이면 물벌레가 만드는 물결 따라 부서지는, 수없이 많은 은빛 파편들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연못에는 아름다운 이들이 모였을 터였다. 정령도 내려왔을 것이고, 잔물결 소리, 밤벌레들의 울음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꾸르륵 거리는 소리......, 내 어린 날의 이 아름다운 소리와 기억들은, 그 후 어려운 세파를 헤치며 살 수 있도록 한 나의 큰 스승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집에서 조금 더 간 산자락 모롱이에는 곳집(상여를 보관하는 초막)이 있었다. 나에게 이 초막은 바로 공포였다. 학교를 가려면 반드시 그 초막 앞을 지나야 했다. 그 앞에서 바로 방향이 바뀌어 비록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갈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하교 길에는 그 초막을 정면으로 한참을 보면서 와야 했다. 부서진 문 틈새로 보이는, 어두운 초막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울긋불긋한 단청의 상여는 다름 아닌 바로 무시무시한 귀신이었다. 고분고분하고 원래 말이 없던 나는 그 무서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 했다. 어두운 곳은 어느 곳이나 귀신이나 도깨비가 사는 시대였고 그 초막의 어두운 내부로부터 겪은 공포는 윗목 장롱 밑의 어두움까지 무섭게 만들어, 장롱 가까이에서는 잠을 못 잤다. 후일 내가 전염병을 앓았을 때 장롱 밑의 어떤 환영을 보았던 것은, 아마 이 같은 경험의 잠재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직장 일로 스페인을 비롯하여 태양빛이 강렬한 여러 나라들에서 근무하면서 특별한 행복감을 느꼈던 것은 어두움을 싫어한 내 어린 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곳, 사시사철 궂은 날이 거의 없는 남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태양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다.
학교는 4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루 왕복 8킬로, 2십리 길이다. 열 살 전후의 아이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일곱 살 때 전염병을 앓아 다시 걸음마를 배웠을 정도로 몸이 약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다리를 앓았다. 전쟁 통이라 학교는 폭탄에 맞아 교실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부족한 교실로 인해 우리는 많은 시간을 느티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 칠판도 책도, 아무것도 없어 선생님은 그냥 옛날이야기만 해주셨다. 선생님 이름을 잊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신립장군이야기라던가 톨스토이의 단편이라는 걸 먼 후일 알게 되었다. 수시로 이야기를 멈추고 하늘을 응시했던 그는, 아마 시대가 가져다 준 근심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한 아이가 방학 공부 책을 사면 둘러 앉아 베꼈다. 개인도 정부도 책을 살 수도 무료로 줄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공부라야 별 기억에도 없고, 우등상 한번 타서 상품으로 구슬치기 용 알록달록한 유리 구슬을 열 개인가 상으로 받아 아이들과 나눠 가진 적이 있다. 미국의 구호 용품이었을 것이다. 5년이나 다닌 학교이니 기억에 남아 있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배가 고파 팔을 들기조차 힘든 아이를 땡볕에 세워 놓고 앞으로 나란히, 바로..., 이는 곳집과 더불어 내가 학교를 싫어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학교 오가는 길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봄, 여름이면 길가 숲속 종달새 집, 냇가의 물새 집을 찾아냈고, 둥지 속의 새알들이 부화를 하여 새끼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입술을 모아 쭈쭈 소리를 내면 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나는 먹이로 잡아간 메뚜기를 그 입속에 집어넣었다. 엄마 새 역할을 한 것이다. 하교 길에선 길 위에 탱크나 비행기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의 의식에 전쟁이 반영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보다 잘 그리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일생 동안 그림이라고는 그려본 적이 없는 내가, 수십 년이 지난 2007년 크리스마스에 내 아내의 얼굴 모습을 그려 선물로 주었을 때 그녀가 놀란 것은, 그 시절 그 길 위에 장난삼아 그린 그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마을 같은 반 급우로 마마 자국이 심한 아이와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여학생이 있었다. 어린 아이들임에도 내외를 한다는 것인지, 그 여학생은 항상 멀리 떨어져 우리들을 따라왔지만 도깨비 고개를 넘을 때면 예외 없이 바짝 따라왔다. 설령 도깨비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열 살 내외의 어린 소년 둘이 대적하여 싸울 힘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남자라고 그 소녀는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에서 그리 했을 것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어 친지 집에 얹혀살던, 말이 없고 얌전했던, 이마에 항상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던 그 소녀가 후일 어느 주막거리 막걸리집 주모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리 마음씨가 고운들 무엇하랴, 험악한 세상 살이 속에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했을 고아 소녀가 세파를 헤쳐 나가기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 얌전했던 소녀가 주모가 되기까지에는 예수님의 길을 가신 성모님의 길만큼이나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기울 개떡이 일반적인 시절이었던 그때, 마마자국 아이는 하학 길에 하얀 밀가루 빵을 먹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노무자인가 뭔가로 전쟁에 동원된 보답으로 학교에서 준 빵이었다. 이를테면 무료급식이었다. 아무런 속이 들어 있지 않은 하얀 색깔의 그 빵은 생전 처음 보았던 것으로 밀가루에 사카린을 섞어, 소다를 넣어 부풀린 것에 불과했을 터였지만 그는 맛있게 먹었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한 입 달라고 한 적이 없고 그도 내게 주어 본 적이 없다. 그 때의 그 꼿꼿함을, 거친 세파를 살아오면서 꺽은 적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빵이 부족해서 그랬을 터였지만, 양이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나누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주었더라면 나눔이 무엇인지를 배운다던가 등 더 교육적이었을 것이다. 시대의 추위에 떨기는 어느 아이나 마찬가지였고 한 조각의 빵에서 제외되었던 그 때의 슬픔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린 날의 상처로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공부가 시원치 않았지만, 난 취학 전 여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떼었다. 책을 샅샅이 읽는 버릇은 아마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전학을 온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초라하고 여윈, 아마 몸에서 냄새도 났을 시골뜨기 나를 얼굴을 찡그리며 경멸의 눈으로 보았던 선생님이 어느 날 한자 시험에서 백 점을 받은 나를 보고 혹 커닝을 하지 않았나 의심했던 일도 내가 학교를 싫어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병명도 알 수 없었던 중병을 앓았던 결과로 소년기까지 잠자리에서 오줌을 쌌고, 오줌을 싸던가 아니면 여러 가지 곤궁한 이유로 결석을 해야 하는 날이 많았고 물어봐도 대답할 리가 없었겠지만, 그러나 선생님은 결석의 이유를 한 번이라도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매만 때렸다. 내가 신문 배달을 할 때 함께 수금에 나섰던 신문 보급소 소장이, 신문의 한자를, 문패의 한자 이름을 척척 읽어 대는 열네 살의 나에게 놀라, 나의 어머니를 찾아와 공부를 시키라는 말을 했을 때 학교는 이미 나의 관심으로부터 머나먼 서역의 나라에 가 있었다. 언젠가 경찰 대학 표창원 교수님이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탈주범 신창원에 관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신창원의 회고록이 인용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학교에 낼 돈도 가져오지 못하는 놈이 뭐하러 오냐며 심한 욕설을 한 뒤 내 마음에 악마가 생겼다”고 했다. 나도 무슨 돈인가의 문제로 변소 청소를 한 경험이 있지만, 그와 나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선생님이 아니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점일 것이다. 천자문 공부의 습관으로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죄는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흘린 눈물은 이해할 수가 있다.
도대체 학교는커녕 학원조차 다녀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공부를 하여 국제무대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가에 의문을 가지고 내게 물어 본 이들이 있다. 이 질문은 바로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공부를 많이 하여 어떤 학문적인 일가를 이루거나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입신양명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퇴직을 했다. 그렇지만 25년 가까운 세월을 무역입국의 최전선에서, 내가 자습한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지식을 무기로 하여 싸웠다는 자존심만은 그 어떤 벼슬보다도 나의 내면에 빛나는 기념비로 우뚝 서 있다.
공부라야 그냥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했던 평균적인 수준의 공부였을 것이다. 물론 성실한 노력을 했지만, 그 정도의 성실과 노력은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내 성장기의 곤궁한 사회적 상황이 나만 경험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 당시의 한국인 누구나 겪은 어려움이었다. 오히려 그 시대에 호의호식을 했다면 지금 그 배경이 의심을 살만한 시대였다. 따라서 내가 남다른 어려움을 극복한 무슨 소영웅이 절대 아님은 물론이다. 다만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냥 혼자 공부가 가능했다는 것, 지금도 혼자 공부를 한다는 것, 지금도 우리 집 아이들의 전공분야인 전기공학, 컴퓨터공학 관련 서적을 어려움 없이 읽는 다는 것, 그래서 81살 나이에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구글 스토어에 올려놓았다는 것, 그러니까 “혼자 공부” 라는 관점에서 조금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되고, 브랜드 없이 내 이름만으로 살아왔다는 것, 따라서 공부(학교)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된다면 이 글은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고 본다.
어렸을 때 나는 저녁밥을 먹고 나면 곧 차디찬 다듬이돌로 옮겨 앉아 글씨가 있는 건 무엇이든 들여다보는 습성이 있었다. 물론 마을 훈장 선생님으로부터 배웠지만, 나의 천자문 공부도 거의 다듬이돌에 걸터앉아 혼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학교를 싫어했지 글을 싫어 한 건 아닌 것 같다. 이는 공부가 두뇌와는 무관한, 성격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성격은 타고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길러진 이를테면 지적 호기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공부가 싫으면 성격이 그러하므로, 성격을 고치면 될 것이다. 성격을 고치는 방법 중 하나는 일정 기간, 쉬운 과목을 하나 선택하여 그 과목에 집중하는 것이다.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다른 길을 개척하면 될 것이다.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하여 몰두한다면, 오히려 더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가치 다양성의 시대인 지금은, 공부를 잘 해야만 하는 것이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입시 경쟁에서의 승리가 인생의 마지막 승부도 아닐 것이다. 입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무슨 수가 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인생살이란 오십보백보로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교 성적과 "정직"은 별개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 전설에 등장하는 다모클레스왕(King Damocles)의 일화가 있다. 왕은 행복할 것이라는 백성들의 믿음에 대해 그는, 왕의 자리는 한 올의 머리카락에 매달아 놓은 칼 밑에 앉아 있는 거와 같다고 했다. 출세의 최고봉에 섰던 대통령이 자살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또 선망의 대상인 고관대작들도 들여다보면 다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현상으로 그럴싸하게 관찰되는 직업에 너무 혹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겠다. 또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날엔가 공부를 하고 싶을 때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경우는 그때 하면 될 것이다. 즉, 태양국가의 시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16세기 이태리 철학자인 토마스 캄파넬라(1568-1639)는 “태양 국가(The City of the Sun)” 라는 소설을 썼다. 이상향에 관한 책이다. 이 나라는 7곱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최고 지도자의 이름은 형이상학(Metaphysics)으로 그는 지혜, 사랑, 그리고 힘이라는 3명의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현세와 정신세계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지혜는 모든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지식을 관장한다. 그는 또 성벽을 관장하는데 그 성벽에는 모든 인문학적, 자연과학적인 지식이 쓰여 있다. 따라서 태양국가의 시민들은 누구나 지식에의 접근이 쉽고, 특히 어린이들은 성벽 아래서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지식을 습득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캄파넬라는 형이상학(즉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도서관 또는 수도원의 지식 독점이 아닌, 쉽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곳을 이상국가로 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제 지식이 범람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태양 국가의 성벽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누구든, 언제든지 이 태양국가의 시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지식에의 접근이 너무나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이겠다.
나는 초등학교 이외에는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지만, 나의 스승이라면 궁핍했으나 목가적이었던 내 어린 날의 자연과 할머니의 옛이야기 그리고 꾸중이 없으셨던 부모님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내가 읽었던 글과 책들을 써 주신 많은 분들도 나의 스승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든 나의 경우 학교는 학비도 내야했고 책도 교복도 사야 했고 밥도 먹어야 갈 수 있었고, 이것저것... 나의, 우리 집 능력으로는 따르기 힘든 여러 가지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곳이었다. 학교가 즐거운 곳이 아닌 공포의 곳으로 나에게는 또 다른 곳집이었다. 그 초등학교를 떠난 후 다시는 그 앞을 지나가기도 싫어 멀리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시절의 이 같은 경험은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워 그 후 학교나 학생을 부러워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타고난 운명이 공부를 해야 한다면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할 운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일생을 아웃사이더로 떠돌이 비슷하게 살았지만 젊은 날은 실제로 부랑자였다. 군대를 가기 전까지 여러 직업, 직업이라기보다는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불량배의 꼬붕 노릇을 비롯하여 은세공 공, 신문배달 등 열 가지도 넘는..., 그 시절의 노고는 손가락 정맥 절단, 화상 등의 신체적 상처로 남아 있다.
열일곱 살이었던가,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앞에 앉은 학생들이 ‘인수분해’ 운운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 순간 나는 나의 짧은 한자 실력으로 사람의 머리를 분해하려면 ‘분해인수’ 해야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같은 마을의 학생에게 물었고, 그는 경멸적인 어투로 수학용어라는 것을 말했고 부끄러움에 못 이긴 나는 곧 서점으로 달려갔다. 이를테면 나로서는 지적 세계로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학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학교를 싫어했기 때문에 학생이 되거나 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일 원했다면 물론 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철이 들면서 생긴 소망이라면 어디론가 멀리, 먼 나라로 떠나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대체로 이루어졌다. 후일 스페인에서 만난 젊은이로부터, 외항선을 타면 불법하선을 통해 미국에 밀입국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진작 알았더라면 나도 그리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외항 선원이었던 그는 미국으로의 불법 입국에 실패하여 스페인에서 불법 하선, 도주했고 불법 하선에 따른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스페인 용병부대에 입대한, 서울의 유수한 K고 출신의 젊은이였다. 용병부대에의 입대는 과거를 묻지 않았으니까. 그 시대 그 먼 나라에 그러한 한국 청년이 있었던 것이다.
중.고교 학력 검정 시험은 쉬웠다. 독학생을 위해 시험을 쉽게 내기도 했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영어, 독일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후일 경제학, 여러 가지 법률학, 스페인어 등등... 막연히 그러나 열심히 공부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이 지식을 만든 이도 있는데, 남이 만든 지식 머리에도 못 넣으랴’ 라는 생각으로 반드시 알아내려고 했다. 이는 지금도 변함없는 나의 독서 태도이다. 혼자의 힘으로 공부하다 보니 무엇보다도 책의 선택이 중요했다. 따라서 좋은 책을 선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칭 일류 학교의 교과과정을 알아내어, 그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를 택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책으로는, 권중휘님의 영어독본은 영미작가들의 빛나는 단편모음이었고, 수학의 원리를 이해함에 이성헌님의 교과서는 발군이었다. 버트란트 럿셀의 “행복에의 정복”을 끝까지 읽고, 기뻐했던 일도 있었다. 그때는 스페인어 교재를 손에 넣기 힘든 시대였다. 문법공부를 끝낸 어느 날, 명동의 길거리 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한 스페인어 다이제스트(Selecciones)를 거의 외우다시피 읽었다. 연세 대 김태성 교수님이 쓰신 “고급영문해석연구”는 문장 분석에 관한한 더 없이 좋은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이 책 구매가 가능한지 모르겠으나, 영어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또 많은 책들이 실망을 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철학이나 사회과학 교과서의 지문이나 인용문들이 난삽하여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고, 이는 대부분 저자의 오역이나 표현력 부족에 기인했음을 후일 알게 되었다.
한 번은 가격론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를테면 도강이다. 교수님의 강의는 대체로 교과서 범위 안에서였고, 따라서 혼자 공부하는 게 절대 불리한 게 아니었음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강의 연속성이 없으니, 도강은 도움이 안 되었다. 변호사시험 예비시험도 쉬웠다. 성적이 좋아 주관부서인 총무처 직원들의 칭찬도 받았다. 당시에는 사법, 행정, 외무 고시를 보려면 4학년 1학기까지 이수하던가 아니면, 독학자를 위한 예비시험에 합격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법률적으로 나는 4학년 1학기 학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이 예비시험은 일제시대에 시행되었던 보통고시 제도의 후신으로, 가난한 집 자손들이 많은 혜택을 보던 제도였다. 당시 나는 내 혼자의 힘으로 박사 학위를 획득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공화당 정부 시절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내신 김사달 박사라는 분이 계셨다. 그는 초등 교육이 전부였지만, 독학으로 의학박사가 된 이다. 의과대학을 나와야 의사가 되는 지금의 상식으로서는 이해 불가능하지만, 당시의 제도가 뒷받침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외무부에 취직을 하면 외국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예비시험 자격증을 들고 외교관 시험을 보고자 했다. 정규교육이 없어 안 된다며 접수조차 받아 주지를 않았다. 그 직원의 무지에 기가 막혔지만, 사회적 약자였던 나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장 어려운 사법 시험 응시 자격이 있었던 내가, 3시 가운데 가장 쉬운 외무고시에 원서조차 못 냈던 것이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학력 폐지를 하여 누구에게나 공직에의 문을 개방하였고, 그래서 나는 입사 시험에 합격, 코트라에 입사를 했고 이에 따라 국제기구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았고, 따라서 무역관계 국제회의에 정부 대표로 몇 번 참가했고,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근무했다. 많은 선배님들의 배려 덕택이었고 그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서병국, 이준식, 전병인, 한상선 선배님들은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다. 모두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와 따듯한 성품을 갖추신 분들이다.
여기서 언급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 가운데 법학대학원의 설립은 그의 많은 지지자들을 그로부터 떠나게 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고 본다. 고교 졸업자는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박정희 정부의 학력 폐지 정책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정책의 덕택으로 고졸의 그가 법률가가 되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 그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으면 법률가가 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였던 그가 사회적 약자의 앞날을 막은 것은 그의 자기모순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시 우리 마을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우리 마을은 외부와 고립이 되어 있었으므로, 전쟁 중 아군이고 적군이고 직접 무장한 군대가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여름 날 외딴집인 우리 집에, 남루한 인민군 병사 두 명이 나타났다. 배가 고프니 밥을 좀 달라고 했다. 겁에 질린 우리 어머니가 보리밥 두 그릇을 내 주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보여 어머니가 물었다. 열다섯 살, 열여섯 살이며 낙동강 전투에서 패배를 하여 퇴각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의 소년이 5~6백리 길을 걸어 온 것이다. 피곤하여 우리 집에서 쉬어가겠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가 기지를 발휘하여, 조금 있으면 마을에 국방군이 들어올 터이니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다. 허겁지겁 도망가던 그들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열다섯 살 아이에게 총을 들려 전쟁터로 보낸 자의 정신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찌하여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동족에게 쳐들어오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반격을 위해 여주에 재집결했다가, 아군의 공격으로 전멸했다는 걸 후일 전사 책에서 읽었다.
내 유년의 여름은 배고픔, 그리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하늘보다 더 많은 별들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의 할머니는 소실이었고 따라서 남편과 함께 살 수 없었던 그녀는 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서출인 그녀의 아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녀의 머리와 옷매무새는 언제나 깔끔했고, 1874년생임에도 한문은 물론 한글도 읽었다. 창원 황씨 양반의 딸임을 자랑스러워했던 그녀는, 서울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부자로 살던 시집간 딸들, 그러니까 나의 고모들에게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던 자존심 강한 여인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돌보지도 않았고 돌볼 이유도 없었겠지만, 오히려 우리 아버지의 채무로 인해 자신의 어머니가 가져온 화류장을 빼앗아간 딸도 있었다. 내가 배가고파 울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귀신과 도깨비가 활개 치는 고개를 넘어 덜 익은 참외, 복숭아를 따다 나를 먹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목구비가 뚜렸한 아이를 보고 며느리,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큰일을 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예언은 빗나갔지만, 그 말은 청소년 기 내 의식을 지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여름 밤 멍석에 누운 나에게 할머니는 견우직녀 이야기라던가, 홍길동전, 홍경래 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 어린 마음을 한 없이 안타깝게 한 이야기들이었다. 밤하늘을 흐르는 유성마다 무슨 이야기든 해주셨다. 누구네 집으로 마실 가는 별이라던가, 관군한테 쫓기는 동학당 같은 별이라던가..., 아마 현대 여성으로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상상력이 풍부한 여류작가의 반열에 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의 할머니는 동학으로 인하여 운명이 바뀐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열여섯의 나이에 어느 양반 집 젊은 선비와 결혼을 했다. 동학 전쟁이 터지자 남편은 전쟁터로 갔고, 그래서 죽었고, 그래서 나의 할아버지 후실이 된 것이다. 1.4후퇴 때, 77세의 나이로 나를 업고 얼음이 흐르는 찬 냇물을 건넜던 여인이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한국 전쟁도 전염병과 함께 왔다. 우리 마을은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 대신 전염병이 휩쓸었다. 의사는 물론 약품도 없었고 무슨 병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냥 염병이라고 했다. 마을 인구라야 2백여 명 남짓했을 것이고 매일 죽어 나갔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거의 다 죽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머니, 나, 그리고 나의 두 여동생이 이름도 알 수 없는 전염병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할머니는 얼마 지나 일어났지만 우리들은 그대로 누워 앓았다. 의사도 약도 없이 그냥 앓았다. 마을의 유일한 치료 방법은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경쟁이가 읽는 경이었다. 경쟁이란 경문을 읽어 귀신을 쫓는 사람이다. 집집마다 돌며 귀신을 쫓으려니 그 바쁜 몸을 모시려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가다 결국은 내 두 여동생이 죽었다. 경문을 읽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해서 살아났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던 경문을 듣지도 못한 채 두 아이 모두 죽었다. 같은 밤 저녁 무렵에, 그리고 새벽녘에 차례로 죽었다. 자지러지듯 우는 우리 어머니에게 똥칠이 아버지가, ‘그까짓 기집 아이들 죽었는데 뭘 그러느냐’하면서, 집단 껴안듯 양팔에 하나씩 껴안고 방을 나갔다. 관이 있을 리 없으니 그냥 생땅에 묻었다. 죽어 예외 없이 그 산에 묻힌 것이다.
마을의 궂은 일을 맡아 한 똥칠이 아버지는 품을 팔아먹고 사는 홀아비였다. 이를 테면 자유 노예였다고나 할까. 그 이름이 독특하니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후일 안 사실이지만, 똥칠이 역시 이미 죽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원래 그 아이의 이름은 동칠이었다고 한다. 동쪽에서 일곱 신선이 나타나난 게 그 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태몽이라고 했다. 그래서 동칠이라고 지은 것이다. 동신이나 동선이라고 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칠자로 지은 것은 행운의 숫자였기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는 대담한 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퉁방울 눈에 얼굴이 검고 하얀 머리칼이 흩어진, 우악스레 생긴 얼굴의 노인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밤길을 가다 만난 도깨비 두 마리와 싸워 때려 눕혔다는 둥,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따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믿기지 않는 한 일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젊었던 시절, 그 좋은 태몽과 커다란 희망을 걸었던 동칠이라는 이름이 어느 날 그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무슨 연고인지 그의 아내가 젖먹이 동칠이를 버리고 달아났던 것이다. 집을 떠난 아내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는 마침내 그 아내를 찾기 위해 집을 떠났다. 괴나리봇짐을 메고 천신만고 끝에 어디에선가 그녀를 찾아냈다. 만난 순간 그는 한마디, ‘옛다, 이년아 이것이나 받아라’ 외치면서 봇짐을 벗어 그녀에게 던졌다고 한다. 죽은 동칠이를 소금에 절여 만든 봇짐이었다. 그렇게 하면 배반한 아내가 급살을 맞는다는 믿음이 있던 시대였다. 믿기지 않는 이 이야기는 19세기말 대한민국 어느 농촌 마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19세기 말 한반도 백성들의 무지함은 단군 시대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살아났다. 그 후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면 살아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경문의 의식을 치룬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의식이 돌아왔다. 눈이 먼 경쟁이가 나를 위해 경을 읽던 그 날 밤의 음울하고 괴이했던 풍경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나의 희미한 의식과 시야에 무슨 허연 물체가 보였다. 한 개였다가 여러 개로 나뉘기도 하고 천정과 벽, 어두운 장롱 밑에서도 보였다. 무슨 노인의 모습일 때도 있었고, 개수가 많아지면 숨이 더 가빠지기도 했다. 특히 어두운 장롱 밑은 그 자체가 두려움이었는데, 그 밑에서 뭔가 허연 것이 어른 거렸고, 어른거림이 빨라질수록 나는 숨이 더 찼다. 모두 고열이 가져 온 환각이었을 것이다. 내 머리맡의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어도 입과 팔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추운 겨울이었고, 희미한 등잔불 밑에 경문을 읽는 이와 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를 데려가려는 귀신을 잡으려고 애들을 썼다. 북을 두드리며, 흰자위만 남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경을 읽었던 경쟁이의 땀에 젖은 얼굴은, 바로 귀신도 무서워했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끊임없이 무슨 신장, 무슨 장군들의 이름을 외쳐댔고, 마침내 대(막대)를 잡은 대잡이의 몸에 경련이 일더니,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곧이어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던 또 다른 이도 몸을 떨기 시작했고, 대잡이가 떨리는 막대로 그 사람의 손에 잡힌 무엇인가를 옆에 놓인 유리병으로 유도했다. 동시에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자지러질듯한 북소리에 맞춰, “들어가라“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병에 넣은 다음 급히 봉을 했다. 그런 다음 모두들 방을 나가 대잡이의 인도 하에 어둠을 헤치고 산 속으로 가, 그 병을 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경문으로 불러들인 신장이 복숭아 나무로 만든 그 막대기에 올랐고, 나를 괴롭히던 그 악귀는 그 신장의 힘으로 참기름 묻힌 밀가루 떡에 홀려 붙었다가 그만 유리병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어이없는 질병 치료법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의 부모님이나 마을 사람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처럼 애를 썼던 것이다. 경문을 읽어 내가 살아났다고는 믿지 않지만 그 경쟁이의 귀신을 방불케 했던 강렬한 얼굴 모습, 악쓰듯 했던 경문 읽는 소리와 북소리, 희미한 등잔불이 벽에 만든 그림자들이 춤추듯 흔들 거렸던 그 밤의 기억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젯밤의 일처럼 또렷한 것으로 보아 그 밤의 강렬함이 나의 꺼져가던 의식을 자극하여 정신이 돌아 오도록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쨌든 그 이튿날 아침 거짓말처럼 의식이 돌아와 찹쌀 경단과 김칫국을 마셨다. 그 김칫국의 맛이 기억 속에 또렷하고, 지금도 나는 감기에 걸리면 약 대신 멸치를 넣어 끓인 김칫국을 마셔 쫓아낸다. 김치에 풍부한 비타민C의 덕일 것이다. 3개월을 앓은 일곱 살의 소년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는 다시 걸음마를 배웠고 일 년 정도 지나 정상적인 걸음을 할 수가 있었다. 이로 인해 어렸을 때는 몸이 약했고, 이는 학교를 오고 가야 하는 고달픈 노동을 싫어한 이유이기도 했다.
궁핍과 땀의 계절이 지나 가을이 오면, 가뭄에 시들었던 풀이 되살아나듯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어디선가 남사당패들이 찾아 왔다. 추수의 계절이므로,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여 그들도 식량을 준비해야할 터였을 것이다. 큰 아버지네 마당이 공연장이 되었고 외줄타기, 상모돌리기 등의 공연을 했다.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남사당패의 공연은 별 재미와 특징이 없었던 것 같고, 다만 그들이 가져온 축음기는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우리 코흘리개들이 그 신기한 기계에 모여 섰다. 축음기의 가냘픈 소리는 어린아이의 소리라고 했다. 어린 아이를 잡아다가 죽여 그 영혼을 동그란 판에 가두었다고 했다. 그러니 모두들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소리가 자즈러들면 아이가 배가 고파 그렇다며, 밥을 주어야 한다고 옆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것이 유성기라는 유식한 정보를 아무도 아이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공포에 질린 채 음악이 아닌 어린 영혼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겨울은 낭만이 함께하는 계절이었다. 알량한 추수로 인해 겨울이 지나면 바로 보릿고개가 닥칠 터였지만, 겨울은 농한기의 마을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계절인 것이다. 보편적인 한국 농촌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을 터이고, 나의 부친은 글을 깨친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저녁이 되면, 마을의 노인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오고,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나의 아버지가 이야기책을 읽었다. 목소리가 낭랑했던 우리 아버지는 가락을 넣어 노래를 부르듯 책을 읽었다. 장화홍련전의 비극적인 대목에서는 슬픈 가락으로 읽었고, 삼국지의 적벽대전 같은 대목에서는 힘을 주어 전투에 임한 장수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비장하게 읽었다. 심약하고 순수했던 농촌의 촌부나 노인들은 이야기에 몰입되어 눈물을 흘리거나, 악인이 망하는 대목에서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우리의 서도민요나 남도민요에서 볼 수 있는 장가들은, 나의 부친처럼 이야기책을 노래하듯 읽는 방식을 통해 발전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 장가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단편소설들이라 할 수 있고, 나는 몇몇 나라들에서 근무하면서 이처럼 가사가 긴 민요의 존재 여부를 알아보았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다만 비교한다면, 한국판 오페레타가 바로 우리의 장가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겨울은 또 야만의 계절이기도 했다. 원시적인 일모작 농업에만 의존했던 농촌의 일손은, 겨울이 되면 할 일이 없었다. 많은 남정네들이 노름을 했다. 그 가엾은 상황의 그 가엾은 마을, 그 가엾은 주민들이 가엾은 상대를 대상으로 노름에 몰두를 하는 것이다. 화폐경제가 미약했던 시절의 가난한 마을이니 만큼, 노름은 주로 쌀 등 현물을 걸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동네 누구는 집문서를, 누구는 토지문서를 잃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어느 날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왜 그 누나가 밑에 집에 가서 살아?”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 애비가 노름을 해서 잃었다는구나, 망할 놈.” 그 소녀의 아버지가 돈을 잃어 다급해지니까 딸을 걸었고, 잃은 돈을 갚을 때까지 딸이 인질이 된 것이다. 또 채패 ,라는 특이한 노름이 있었다. 물주가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은 숫자를 알아맞히면, 열배인가 백배인가를 주는, 요즈음으로 치면 일종의 복권 식 노름이다. 최근 죽은 처녀가 꿈에 현몽을 하여 이 숫자를 가르쳐 준다는 믿음이 마을 사람들에게 있었고, 따라서 그 추운 겨울에 남의 무덤가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 수시로 죽어, 새로 생긴 처녀의 무덤이야 여기저기 흔하던 시절이었다. 아편쟁이에다 노름에 미쳤던 나의 오촌 당숙은 이렇게 해서 무덤가에서 얼어 죽었다. 또 어느 마을에서는 보쌈으로 이웃 여인을 납치해왔다던가, 맞선의 자리에는 멀쩡한 사람을 보내고, 초례청에는 몸이 온전치 않은 다른 남성이 나타났더라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지금 같으면 모두 법의 처벌을 받아야할 미개한 일들이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들은, 전시 하의 대한민국 어느 농촌 마을 풍경이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농촌이 이처럼 미개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 식민 정책 때문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일본은 이미 막부시대에 서양의 과학적, 합리적 정신 즉, 계몽주의를 받아들였으므로 조선에 대해 같은 정책을 폈더라면 적어도 역병을 경문으로 치료하려 했다던가 등, 터무니없는 미신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일제의 덕택으로 개화가 가능했다는 어떤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됐던 이 같은 무지를 갈아엎은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고, 이것이 바로 그의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향수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비록 굿이 민속 문화에 기여한 공이 무시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치하에서 굿은 불법이었다. 어두움과 미신, 무지와 가난이 뒤범벅이 된 그 마을에 희망이 있을 리가 없었던 나의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 서울로 갔다. 1956년,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던 그곳으로...
내가 사진을 찍기 위해 에펠탑 앞에 선 것은 1977년 4월 초 어느 날이었다. S촌의 파리,라는 이름의 찻집에 신문 배달을 하면서 그 탑 그림을 처음 본 후 20년이 되었을 때였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UN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에 참석하기 위해 제네바로 가는 길이었다. 그 당시 유럽을 간다는 것은 꿈길 그 자체였다. “헨리 소로우(Henry D. Thoreau; 1817~1862. 미국 시인)”의 말처럼 신념을 가지고 꿈을 향해 나아가면 어느 날 갑자기 그 꿈이 실현된다는 걸 실감한 날이었다. 나는 이날을 계기로 향후 운크타드 회의를 비롯해서 가트(GATT)총회에 정부 대표로 여러 차례 참가를 했고, 여러 나라들에 주재하며 한국의 수출 진흥을 위하여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 항공은 유럽 노선이 없어 동경에서 갈아타야 했다. 동경에서 갈아탄 스칸디나비안에어라인 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다. 몇 시간을 비행한 다음인가, 갑자기 뒷좌석 쪽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보니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럽으로 입양을 가는 스무 명 정도의 아동들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슬펐다. 그 시대 상황을 상징하는 사건이고 장면이었다. 1977년이면 우리나라의 수출이 1백억 달러를 달성한 해였다. 지금은 수출 7천억 달러의 무역 대국이 되었지만 당시의 1백억 달라는 꿈의 목표이기도 했다. 한국의 수출은 1945년 9월, 그러니까 해방 한 달 후 맥아더 정부 하에서 일본과 미국에 천일염을 수출한 것이 처음이었다. 1946년에 1백만 달러를 기록했고, 1964년 11월 30일 1억 달러를 달성해서 이 날이 무역의 날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후 60년 만에 7천배가 증가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수출 증대를 위해 노력한 것을 여기서 상술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머니와 누나들의 검은 머리털을, 남자들의 소변을 의약품 원료로 수출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후세대가 알아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또 지금은 많은 무역 전문가들이 있지만, 여러 무역 전문 용어들의 정의를 내리고 밝힌 것은 많은 경우, 코트라 요원들에 의해서였다. 나는 운크타드가 주역이 되어 실시되었던 특혜관세의 전문가였다. 그들이 보내 준 자료를 퇴근 후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한 기억이 새롭다. 특혜관세란 개발도상국들의 기술 향상과 수출 확대를 위해 당시의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 상품에 부여한 무관세 대우를 말한다. 무관세 대우의 기준은 가공도와 부가가치였는데, 일정한 기술적 가공을 하거나 수입 원자재를 사용한 경우, 부가가치를 창출해내야만 이 특혜 대우를 해주는 제도였다. 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라는 취지가 담긴 제도였다. 한국의 수출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던 이 제도는, 전 세계 모든 개발도상국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이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개도국들의 수출이 정체되고 가난에 허덕이는 것을 보면 한민족의 저력을 알 수가 있다.
그날 제네바의 회의장(Palais de Nations)의 질서정연하고 신사적인 분위기의 회의는, 내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학예회에도 참가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전 세계 많은 나라들에서 온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우리나라의 무역을 위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의장의 기조연설이 있은 후 차례가 와 우리 대표의 연설이 있었다. 나의 견해가 반영된 연설이었다. 각국 대표의 연설 내용과 어휘는 대체로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던 거와는 달리 잘 들렸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내가 국제회의장에서 각국 대표들이 한 영어 연설을 무리없이 듣고 보고서를 쓴 것이다. 우리 대표단 옆에는 캄보디아 대표단이 있었다. 그때의 캄보디아는 공산 정권이었다. 내심 기분이 나빴지만, 그들의 일하는 자세는 본받을 만했다. 우리처럼 말끔한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기록하는 모습으로 보아 속기사인 듯했다. 연설자의 말을 여러 사람이 열심히 기록을 하고 있었다. 녹음도 했다. 회의가 끝나면 모든 연설문들이 자료로 만들어져 배포되었으므로 그들의 작업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들의 열정적인 태도는 본받을만했다. 회의가 끝난 다음 본 몽블랑이라던가 동화 속의 마을 같은 샤모니, 제네바 호수의 아름다움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나는 여러 차례 알프스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된다.
II. S촌
1956년 도착한 S촌은 내가 떠난 마을보다 크고 자동차가 굴러 다녔을 뿐, 초가집에다 논과 밭 모든 게 비슷했다. 고개를 넘어야 시내로 갈 수가 있었고, 고개 너머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 고개에서 저항하던 적군이 인천상륙으로 진군하던 아군에게 저항하다 모두 죽어, 그 시체들을 현장에 그냥 묻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좁디좁은 고개였다. 겨울이면 서북풍의 맞바람을 안고 넘어 갈라치면, 칼날 같은 추위로 인해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추운 고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후 경제적 발전은 그 고개의 발전도 가져와 지금은 꽤나 넓게 확장이 되어 있다. 그 초등학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선량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담임선생님과 시골뜨기라고 놀리던 아이들, 학교 앞을 흐르던 악취 나는 개천, 시골의 투명한 공기를 호흡했던 내가 그 개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교정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그 시궁창 냄새 때문에도 학교 가기를 싫어했던 기억 이외에는 그 학교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다. 졸업 때까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었으니까.
S촌은 대체로 서향의 곳이다. 높다란 산을 배경으로 서향의 개활지에 구릉 형태의 조그만 산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는 곳이다. 그 높은 산의 등성이가 대체로 서향을 향하고 있어, 한 때 왕조의 도읍 후보지이기도 하였던 그곳이 지금의 서울에 그 자리를 빼앗긴 것은, 서향은 낙조를 뜻하여 왕조의 조락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전설 같은 말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왕조도 결국 몰락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내로부터 고개를 넘어 온 버스가 반 마장을 채 못가 종점이 있었고, 그곳은 서울의 서쪽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곳을 종점이라고 불러 택시를 탈 경우 기사를 혼란케 한다. 버스가 다니는 길 이외에는 포장이 안 되어 비가 오면 모든 길이 진창길로 변했다. 종점을 지나 서쪽으로 반 마장쯤을 또 가면 한강이 흘렀다. 그곳에는 하얀 모래로 이루어진 섬에 땅콩 밭이 있었다. 땅콩 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들켜 치도곤을 맞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절도죄로 모두 소년원 신세를 질 일이었다. 여름이면 우리들은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흐르는 한강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밥을 해먹었다. 한강 물이 그처럼 깨끗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곳은 쓰레기 산이 되었다가 지금은 스포츠 컴플렉스가 되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웠던 자연을 우리가 잃은 것이다. 그 섬의 동쪽 맞은편에 산이 있었고 그 산 앞에는 논들이 있었으며, 논에 물을 대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이 저수지에서 빨래도 하고, 겨울이면 썰매도 타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모여 헤엄도 쳤다. 어머니를 따라 빨래를 하러 간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 저수지에서 한 번도 수영을 해본 적이 없다. 그 이름이 시체를 연상시키는 "송장내"였기 때문이다. 이 기분 나뿐 이름의 저수지에서 시작되는 경사면을 따라 오르면, 야트막한 산기슭에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성채가 있었고, 그 성채 앞에는 유리공장이 있었다. 대롱에 매달린 벌겋게 달은 유리덩어리를 입으로 불어 병을 만드는 유리공의솜씨를, 우리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했던 그곳이 이제는 젊은이들을 위한, 젊은이들 문화의 거리가 되어 그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그 산 너머에는 서울에서 생산된 인분을 모아 두는 거대한 탱크들이 있었다. 홍수 때면 그 인분이 넘쳐 S촌의 종점까지 밀려들어왔다.
S촌 달동네의 문간방이 서울로 와 처음 살게 된 공간이었다. 서향의 창을 열면 멀리 한강이 보였다. 거의 매일 지는 저녁노을의 창연함은 나에게 비극적인 정서를 키워준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때때로 엷은 밤안개가 내린, 달빛에 몸을 감싼 창 밖 S마을은 바로 몽환경 속의 모습이었다. 겨울이 되면 혹독한 서북풍이 불어오는 쪽 아득히 멀리 뵈는 한강물의 보석처럼 빛나는 반짝임, 그리고 공기가 맑은데다가 인공의 불빛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달동네를 비추던 총총한 달빛과 별빛은 나의 위안이기도 했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많은 별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밤하늘, 그러니까 밤하늘의 별 보기를 좋아한다. 일종의 취미라고나 할까? 그 후 캐리브 바다에 면한 나라에서 살 기회가 있었고, 열대의 바닷가에서 본 밤하늘은 바로 경이였다. 빈틈없이 별들이 들어선 밤하늘에는 2천억의 2천억 배가 되는 별들이 있다던가? 저녁을 먹은 후 이곳 우리 집 테라스에 서면, 아득히 먼 별자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비가 개인 후의 맑은 초저녁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다투어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별들로부터 보드라운 바람을 타고 잔물결 이는 소리 비슷한, 풀벌레 소리 비슷한 감미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만일 출세를 하여 금력과 권력을 쥐고 있다면 듣게 될 터인 달콤한 아첨의 소리가, 이 자연의 소리만큼 아늑하고 행복하게 들릴 수 있을까? 아득한 그곳에는 아름다운 신화와 전설들이 있지만, 그곳에 어떤 지적능력을 갖춘 생명체가 있다면, 그 삶의 모습도 이곳 지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자원은 제한되어 있을 것이고, 먹어야 하는 문제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의 고단함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밤하늘 속의 영원을 보면 아름다움과 함께 일상의 욕심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당시의 S촌은 젊은이들을 위한 네 개의 성채가 있었다. 우리 집은 S촌 전체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고, 그 중 여인들만이 허락된 성채는 아주 가까이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개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남녀를 모두 허락하는 또 다른 성채가 있었다. 여름 날 밤이면 우리가 목욕을 가던 그 개천은 어느 날엔가 복개가 되어 자동차 길이 되었다. 우리들의 아쉬움은 물론, 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의 단순함이 사라지고, 복잡해져 가리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성채들에서 훈련된 이들이 후일 한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터였지만, 이 성채들은 또 백성의 신분을 가르는 갈림길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 후 세상을 살아오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성과 오만이 혼재했던 곳이 틀림없었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그곳에서 오만을 가르쳤을 리가 없었겠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그 성채들에서 온 많은 이들의 언행에서 얻은 결론이다. 고졸의 대통령이 부끄럽다던가,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편견 등... 그런 말을 할 수야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과 삶에 대한 사랑과 통찰이 부족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재주일 수는 있지만, 오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남이 만들어 낸 지식을 머리에 넣었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닐 것이다.
여인들만이 허락된 그 성채의 앞에는 시내로 가는 철도길이 있었다. 기차는 터널을 지나야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터널에 식량을 보관했던 적군이 아군의 B29와 쌕색이(F86)공격에 떼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왔고, 큰길가의 우체국 건물에서는 앞에서 말한 두 성채의 좌익 젊은이들이, 진격해오는 아군에 저항하다가 모두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왔다. 철도가 있으니 철도를 관리하는 선로반이라는 곳이 있었고 물론 기차역도 있었다. 여인들의 성채 정문 가까이 선로반이 있었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3~4백 미터쯤에 기차역이 있었다(지금도 있다). 기차역 언저리에는 그 성채의 여인들과 같은 또래의 여인들의, 반은 홍등가인 주막거리가 있었다. 땅거미가 지면 술집의 여인들이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들의 유일한 재산(?)인 넓적다리를 내놓고 호객 행위를 했다. 내가 떠나온 마을처럼 가난한 농촌의 딸들이었던가 아니면 전쟁의 상처로 만들어진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주막거리는 성채에 이르는 길 가운데 하나였고, 그곳을 지나는 성채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오히려 수치감 때문인지 책이나 노트로 얼굴을 가린 채 종종걸음을 했다. 50년대 후반은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남녀노소 누구나 방황하던 상실의 시대였고, 당연히 내가 살던 달동네도 상실의 마을이었다.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온 옆방 상이군인의 절망적인 울음과 술주정, 억센 평양도 사투리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욕설을 해대던 월남가족의 부부싸움, 술지게미를 아침으로 먹고 등교한 중학생이 선생님에게 매를 맞고 쫓겨 온 일들이 이를테면 우리 집 한 지붕 세가족의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술이 취한 것으로 오해를 했을 것이다.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이처럼 백성들은 모두들 불우했던 역사와 전쟁의 패배자들이었다.
당시의 사회는 무질서했고 따라서 불량배, 깡패들이 들끓던 세상이었다. 전쟁이 가져온 폭력이 휴전과 함께 방향을 바꾸어 시민을 향해 휘둘러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폭력을 처벌하는 법이 없었고, 경찰도 개의치 않는 시대였다.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이 제정된 것은 그 후 군사정부에 의해서였으니까. 이정재, 임화수라는 정치깡패는 물론 명동파, 광화문파, 무슨 고등학교파...등등 폭력배들의 세상이었다. 한 걸음이 멀다하고 깡패 조직이 설쳐대던 시대였다. S촌은 선로반 파, 역전 파, O산 파, 종점 파 등 여러 폭력배가 있었다. 역전 파는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기차를 무대로 한 소매치기 전문이었다. 소매치기뿐만 아니라 무력도 강해 그들에게 걸렸다하면 초죽음을 당했다. 한국 제일(?)의 여성들만을 위한 성채 바로 앞을 지나는 기차선로 옆에 자리를 잡은 선로반파는 폐품수집이 전문이었고 많은 수가 역시 전쟁고아들이었다. 역전파와 선로반파는 지근 거리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그들은 기찻길에 널려 있는 돌맹이(짱돌), 단도, 군용탄띠, 자전거 체인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여 패싸움을 벌렸다. 이러한 무기들은 그 당시 폭력배들이 사용했던 일반적인 무기들로, 무기도 영혼도 모두 석기시대로 돌아갔던 것이다. 모두 전쟁의 패배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달동네 우리 마을도 예외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동네는 가정이 있는 청소년들이었고, 수준이 높은(?) 폭력단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두목이 명동에 진출한, 이를테면 출세를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깔끔한 옷차림에 깨끼구두(반짝거리는 비닐구두)를 신었고 우리들도 잘하면 명동에도 진출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성격이 폭력적이지 않아서인지 깡패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러나 명동에 진출할 수 있다는 말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형 덕택(?)에 명동이라는 데를 알게 되었고, 그 후 돌체, 청자, 심지, 삼화 등 여러 다방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하며 엘비스 플레스리, 폴 앵커, 패티 페이지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제 일 같은데 얼마 전 패티 페이지를 마지막으로, 방황하던 우리들의 영혼을 달래주던 그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들 두목의 동생은 나와 동갑으로 키가 작고 강인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그의 형이 두목이라는 든든한 권력(?)의 배경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싸움에 일가견이 있어 그의 앞에서는 모두들 꼼짝을 못했다. 한 번은 종점 파와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맨 앞에 선 그가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며 공격해 나갔고, 그 쇠사슬을 맞고 쓰러진 상대방 소년을 집단 구타한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모두 잡혀갈 일들인데, 당시에는 대한민국 어디서나 흔한 일이었다. 그처럼 독종이었던 그도 나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유순했다. 그즈음 나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움틀 때였고, 그에게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게 더 부드럽고 관대했다. 그와 헤어진 후 사십여 년이 지나, 그가 폭력전과 6범의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로 전쟁 중 적군에게 납치된 이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에 대한 연민과 구질구질한 달동네였지만, 언제나 하얀 소복의 단정한 차림새였던 그의 어머니를 기억했다. 악인과 선인의 차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가 오명을 남기고 죽었지만 범죄적인 천성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이 아니었다. 어렴풋하나마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그렇고, 다만 전쟁이 가져온 폭력을 어린 나이에 배운 후천적인 폭력배였고 그로 인해 일생을 불명예스럽게 마친 것이다. 이에 반해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은, 그 타고 난 본성이 범죄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산비탈 우리 동네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의 아래에 있는 그 성채의 정문에서 시작되는 거리는, 당시로서는 서울에서 손꼽을만한 문화의 거리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젊은 여인들이 풍기는 향기로 인해, 젊은 남성들이 모여들고 가슴을 설레는 거리이기도 했다. 나의 삶과 의식에도 물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거리였다. 어여뿐 여인을 보면 가슴을 설레이던 시절에 그녀들과는 전혀 다른 목적 때문에, 그녀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냄새나는 도시락을 들고 가야만 하는 우울함이 있었다. 이 우울함은 바로 당시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의 동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밤늦도록 그 성채의 여인들로 그 거리는 가득했고 그녀들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여러 상점들이 좁은 거리의 양 편에 줄지어 있었다. 포장이 안 된 도로는 비가 오면 진창길로 변했고, 이 거리의 뒤편으로는 호박밭과 진창길의 시장이 있었다. 해가지면 별이 뜨듯, 밤이 되면 우리들도 삼삼오오 이 거리로 모였다. 이 거리에서 만난 나의 죽마고우 구군은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그는 청량리부터 시작하여 S촌에 이르기까지 신문을 팔던 소년이었고, 그 돈으로 과수댁의 어머니를 돕던 효심이 깊은 아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어머니가 가엾다는 말을 늘 했던 그는 은행원으로 성공한 후 은퇴를 했다. 어린 나이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바로 될 성 싶은 떡잎이었던 것이다. 항상 웃는 얼굴의 고아였던 백군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구정물이 강을 흘러 바다에 이르면 깨끗한 물이 되듯, 전혀 희망이 없으리라 여겨졌던 그 거리의 소년들이 긴 세월의 강을 흘러 지금은 모두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어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거리에는 미군 지프차에 치어 장애인이 된 아들에 대한 보상으로, 미군이 대주는 밀가루로 빵을 만드는 빵집이 있었다. 내가 이 빵집에서 처음 먹어 본 빵맛의 경험은 이를테면 풀빵이나 찐빵, 또는 호떡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서양식 먹거리와 조우한 충격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거리의 찻집에서 노랫말의 뜻도 모른 채 처음 듣고 감격했던 노래는, 스테파노가 부른 아리아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 거리의 다방에서 들은 음악으로 인해 내가 얻게 된 음악적 관심은, 그 후 기타 공부를 조금 하여 무교동의 술집에서 잠시 따분한 악사로서 일을 하게 만들었고, 그 후 스페인으로 가 머무는 동안 위대한 기타 음악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가냘프던 음악적 지식과 관심은 스페인에서 첼로 공부와 연결이 되었고, 그 빈약한 첼로 공부는 그 후 캘리포니아로와 어바인 칼리지 교향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연주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내 청소년기의 그 거리는 슬픔과 열등의식,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아련한 꿈과 지적인 호기심이 뒤범벅이 된 채 "거리에 버려진 휴지"처럼 떠돌던 곳이었다. 맹모삼천지교라던가, 지적인 호기심에 관한한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주신 나의 부모님이 고마울 뿐이다. 23년이라는 세월을 그 거리 언저리에서 배회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을 보고 만났지만, 그 거리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때 내가 다방에서 본 강렬한 인상의 젊은이가 후일 국회의장 이만섭 옹이다. 당시 그는 S촌에서 Y대 털보로 불렸고 군복을 물들인 검은 작업복에 목을 자른 군화를 신은, 짙은 색깔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눈이 형형하고 얼굴빛이 창백했던 젊은이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특이 했던 외모는 그때 그곳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그 성으로 들어가고자 준비를 하고 있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그 성으로 들어갔고, 나는 군대로 들어갔다. 그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그 가냘프고 섬세했던 소녀는, 죽지 않았다면 이제 노인이 되어 어느 하늘 아래에서인가 살고 있을 것이다. 모두 세월의 슬픔이고 인간사의 덧없음이라 할 것이다. S촌에서 나는 소년기, 청년기에 걸친 23년을 살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고, 그곳에서 멀리 떠나온 지금, 눈 감으면 그곳 구석구석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지금처럼 유흥과 퇴폐의 거리가 아닌 아름다운 꿈과 슬픔이 교직된 나만의 곳인 것이다. 1979년 그곳을 떠나 나의 아내와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로 갔다. -끝- 이 블로그의 주인 박흥서 씀.
----------------------
"본 블로그의 주인이 81세 때 만든 컴퓨터 게임." 여기를 누르세요 - >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DefaultCompany.TheFlyingFireball
그리고 이곳에는 87편의 영미 문학 번역본과 30편의 주제별 글이 있습니다. 아래의 주소를 누른 후
"Powered by Blogger"를 누르시면 전체 글이 등장합니다.
https://www.beethovennote.com/
댓글
댓글 쓰기